
고구려 멸망 (서기 668년)
700년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북방의 제국 고구려가 내부 분열과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함
- 연도: 668
- 시대: 고구려
- 상대: 당(唐)·신라 연합
- 장소: 요동 및 평양성 일대
- 피해: 고구려 멸망 및 20만 명 이상의 포로 발생
본문
서기 668년 9월, 700년 동안 동아시아의 하늘을 호령하던 북방의 거인 고구려가 마침내 평양성 함락과 함께 그 거대한 몸집을 뉘었다. 고구려의 종말은 외부의 칼날보다 무서운 내부의 부패와 배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찬란했던 고구려의 문명과 기상은 평양성을 집어삼킨 거대한 화염 속으로 사라졌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제국의 마지막은 고통 섞인 비명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위대한 지도자 연개소문이 서거한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은 고구려의 숨통을 끊어놓는 결정적인 비수가 되었다. 장남 연남생과 동생들인 남건, 남산은 고구려의 보물 같은 궁궐 복도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벌였다.

형제간의 증오는 조국에 대한 충성심보다 깊었고, 이 분열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회를 제공했다.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장남 연남생은 결국 고향을 버리고 적국인 당나라로 투항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당나라의 실질적인 길잡이가 되어 고구려의 핵심 방어 정보들을 넘겼다.

당나라 장수 이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문의 열쇠를 바치는 연남생의 모습은 고구려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주었으며, 이는 제국의 붕괴를 앞당기는 가속 페달이 되었다.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겹겹이 포위한 지 한 달, 성 안은 굶주림과 역병으로 생지옥이 되었다.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다시 한번 내부로부터 일어난 배신이었다. 고구려의 핵심 요직에 있던 승려 신성(信誠)이 야음을 틈타 평양성의 육문(六門)을 몰래 열어준 것이다.

굳게 닫혀있던 철옹성이 내부자의 손에 의해 허무하게 열리는 순간, 고구려의 700년 역사는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적군 앞에서 평양성 백성들은 눈물조차 마른 채 마지막 저항을 이어갔다. 보장왕은 굴욕적으로 당나라 군영으로 끌려가 무릎을 꿇어야 했고, 고구려의 웅장한 궁궐은 사흘 밤낮을 불타며 재가 되었다.

수만 권의 기록물과 고대 서적들이 불길 속에서 사라지며 한민족의 드넓은 기상과 역사가 한순간에 지워졌다. 지도층의 분열이 어떻게 민족의 대동맥을 끊어놓는지를, 고구려의 마지막 밤은 우리에게 피 묻은 교훈으로 전해주고 있다. 멸망 직후의 풍경은 더욱 참혹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부활을 막기 위해 핵심 인력 20만 명을 중국 내륙의 척박한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정든 요동의 벌판을 지나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조국 땅을 향해 피눈물을 흘렸다. 낯선 이국 땅에서 노예로 살아가며 성씨마저 잃어버린 20만 유민들의 한 맺힌 영혼은 지금도 만주 벌판의 차가운 바람 소리가 되어 역사의 진실을 외치고 있다.
의의
700년 역사의 북방 대제국 멸망. 고구려 유민의 발해 건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적 저력의 바탕.
출처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편
- 구당서
- 신당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