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전투와 5만 대군의 치욕 (1592년)
임진왜란 최대의 치욕. 5만 조선군이 1,600 왜군에게 궤멸
- 연도: 1592.6.6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장소: 경기도 용인
- 피해: 조선군 수천 명 전사, 5만 대군 와해
본문
【서장: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다】 서기 1592년 음력 5월, 조선 팔도에는 절망과 함께 희망의 불씨도 타오르고 있었다.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로 피란한 지 한 달,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들도 흩어진 군사를 모아 반격을 준비했다. 경기도 수원에는 조선 조정이 급편한 새로운 희망이 모여들고 있었다. 전라도에서, 충청도에서, 경상도에서 모여든 관군과 의병들.

그 수가 무려 5만에 달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이 편성한 최대 규모의 야전군이었다. 5만 대군. 이 숫자는 조선인들에게 거대한 희망이었다. 한양을 탈환하고, 북으로 도망친 왜적을 물리치고, 선조 임금을 다시 모셔올 수 있으리라는 꿈.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군대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균열은 곧 조선 전쟁사 최악의 참패로 이어지게 된다. 【제1장: 오합지졸의 군대】 5만이라는 숫자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군대'라 부르기 어려운 집단이었다. 우선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웠다. 명목상 총사령관은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이었다. 그러나 그 휘하에는 경기순찰사 권징(權徵), 수원판관 변언수(邊彦脩), 조방장 곽영(郭嶸), 충청병사 원호(元豪) 등 각 도의 장수들이 있었고, 모두가 자신의 군대만을 지휘하려 했다. 이들은 모두 급히 모인 군대였다. 평시에 함께 훈련한 적도 없고, 통합된 작전 지휘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장수들 사이에 알력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경상도 병사들은 왜 충청도 장수의 지휘를 받아야 하오?" "전라도가 수가 많다고 으스대는군." "수원 병력이 없으면 어디서 군량을 구할 것이오?" 이광은 이런 장수들을 통솔할 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다. 회의는 다툼으로 끝나고,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병사들의 질도 문제였다. 5만 중 정규군 훈련을 받은 자는 1만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농민, 상인, 노비 등 급히 징집된 민병들이었다. 칼을 잡아본 적도 없는 자들, 활을 쏠 줄 모르는 자들, 심지어 쟁기와 낫을 들고 온 자들도 있었다. 무기도 부족했다.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급조된 군대에 충분한 무장을 갖출 수 있을 리 없었다. 갑옷은 장수들과 일부 정규군만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흰 무명옷 차림이었다. 군량과 보급도 엉망이었다. 각 도에서 가져온 군량은 제각각이었고, 통합된 보급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부대는 굶주리고 있었고, 어떤 부대는 과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정보의 부재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맞설 적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왜군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싸우는지, 무슨 무기를 쓰는지. 모두가 막연한 추측에 의존하고 있었다. 【제2장: 용인을 향하여】 5월 말, 이광은 마침내 북진을 결정했다. 목표는 한양 탈환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한양으로 가는 길목, 용인 일대에 주둔한 왜군을 먼저 격파해야 했다. "용인에 왜적이 1천쯤 있다 하오." 정찰병이 보고했다. 사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 정찰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왜군의 실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5만 대 1천. 장수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떠올랐다. "50배의 병력이라. 쥐잡듯 잡는 것이오." "단숨에 밀어붙이면 끝이오." 누구도 신중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적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전군에 퍼졌다. 6월 초, 5만 대군은 수원을 출발하여 용인으로 향했다. 대열은 수십 리에 걸쳐 늘어졌다. 먼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들판을 울렸다. 용인 인근 광교산 일대에 도착한 조선군은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혼란스러웠다. 어느 부대가 어디에 진을 칠지 정해지지 않았고, 장수들 사이에 또다시 다툼이 벌어졌다. "이 위치는 전라도 군이 점했소!" "하나 물과 땔감은 우리 경기도 관할 아니오?" 결국 5만 대군은 광교산 일대에 제각각 흩어져 진을 쳤다. 중앙에서 통제되는 방어선은 없었고, 부대 간 연락체계도 허술했다. 경계와 정찰도 소홀했다. 적이 1천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3장: 와키사카 야스하루, 검은 용이 깨어나다】 그러나 용인에 있던 왜군의 실체는 조선군의 상상과 달랐다. 당시 용인 일대에 주둔했던 왜장은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군 제독으로, 뛰어난 전술가이자 무자비한 전사였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약 1,600명. 숫자는 조선군의 30분의 1에 불과했지만, 질적으로는 전혀 달랐다. 와키사카의 병사들은 일본 통일전쟁(센고쿠 시대)을 겪은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모두가 실전 경험이 있었고, 조직적인 전술 훈련을 받았다. 무장도 완벽했다. 예리한 일본도, 긴 창,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운 조총(鳥銃). 조총은 당시 동아시아 전장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조선의 활보다 사거리가 길었고, 관통력도 강했다. 무엇보다 훈련되지 않은 병사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왜군은 이 조총을 조선군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와키사카는 조선의 5만 대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숫자만 보면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싸우기로 결정했다. "저 조선군을 보라.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저들은 군대가 아니라 무리일 뿐이다." 와키사카는 조선군 진영을 정찰하게 했다. 정찰병들이 돌아와 보고했다. 조선군은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경계가 허술하며,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다. 와키사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야습을 결심했다. 【제4장: 6월 5일 밤 - 폭풍전야】 1592년 음력 6월 5일 밤, 용인 일대는 고요했다. 조선군 진영에서는 내일 있을 전투에 대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일부 장수들은 새벽에 총공격을 제안했고, 다른 장수들은 더 많은 정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논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병사들은 피곤에 지쳐 잠들었다. 며칠간의 행군으로 지친 몸이었다. 경계병들도 졸음을 참지 못했다. 적이 1천밖에 없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 있었다. 한편 왜군 진영에서는 전혀 다른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전군을 모아 작전을 지시했다. "새벽 4시, 조선군 진영의 핵심부를 향해 돌격한다. 우리는 작지만 날카롭다. 빠르게 적의 심장을 찌른 뒤 혼란에 빠뜨린다. 저들은 오합지졸이다. 핵심만 무너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진다." 1,600명의 왜군은 검을 갈고, 조총을 점검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5장: 6월 6일 새벽 - 악몽이 시작되다】 1592년 음력 6월 6일(양력 7월 4일 추정),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 어둠 속에서 1,600명의 왜군이 조선군 진영을 향해 접근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조선군의 경계선은 있으나 마나였다. 졸고 있거나 방심하고 있던 경계병들은 왜군이 눈앞에 나타나서야 비로소 적의 존재를 알아챘다. "적습! 왜적이다!" 외침이 들리는 순간, 조총 소리가 새벽을 갈랐다. '쾅! 쾅! 쾅!' 경계 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잠들어 있던 조선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나는 순간 화승총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와키사카의 공격은 조선군 지휘부가 있는 중앙 진영을 향했다. 왜군 기마대가 돌진했다. 수백 명의 기마 사무라이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막사 사이를 내달렸다. "도주하라! 도망쳐!" 누군가의 외침이 공포를 퍼뜨렸다. 아직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병사들이 허둥대며 뛰어다녔다.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제6장: 대붕괴】 조선군 5만 대군의 붕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중앙 지휘부가 공격받자 각 부대는 고립되었다. 장수들에게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아니, 명령을 내릴 장수들 자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광 순찰사는 피란을 결정했다. 그의 도주는 전군의 사기를 무너뜨렸다. "대장이 도망쳤다!" "버려졌다! 우리는 버려진 것이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5만 대군이 2천도 안 되는 적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성은 이미 공포에 잠식당했다.

조선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어던지고, 군기와 북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왜군이 없는 방향으로 달렸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이들이 죽었다. 동료를 밟고 넘어지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강물에 빠졌다. 왜군의 칼보다 혼란 속 사고로 죽은 이가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왜군은 도망치는 조선군을 추격했다.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조차 이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50배의 적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전투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해가 높이 뜨기도 전에 5만 대군은 사실상 소멸했다. 【제7장: 참담한 결과】 용인 들판에는 버려진 무기와 장비, 군량미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왜군은 거의 피해 없이 대승을 거두었다. 사망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반면 조선군의 피해는 처참했다. 전사자만 수천 명. 부상자와 실종자는 셀 수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5만 대군 자체가 완전히 와해되어 다시 모을 수 없게 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도망쳤다. 어떤 이들은 산속에 숨었고, 어떤 이들은 의병에 합류했으며, 어떤 이들은 전쟁 자체를 포기하고 숨어버렸다. 5만의 군대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총사령관 이광은 전주로 도주했다. 그는 조정에 거짓 보고를 올렸다. "적이 너무 많았다",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장수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등등. 그러나 진실은 곧 밝혀졌다. 1,600명에게 5만이 패했다는 치욕스러운 진실이. 조정은 경악했다. 선조는 분노와 절망에 빠졌다. 한양 탈환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오히려 왜군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조선 남부를 유린했다. 【제8장: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용인전투의 패배는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조건이 패배를 향해 정렬되어 있었다. 첫째, 지휘체계의 부재였다. 5만 대군에 통합된 지휘관이 없었다. 이광은 명목상 총사령관이었지만 실질적인 통솔력이 없었다. 각 도의 장수들은 서로 견제하며 명령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통일된 대응이 불가능했다. 둘째,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 5만 중 실전 경험이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한 달도 안 되어 징집된 농민들이었다. 전쟁이 무엇인지, 싸움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충격에 무너지는 것은 당연했다. 셋째, 적에 대한 철저한 무지였다. 조선군은 왜군의 전술, 무기, 실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오랑캐'라고 무시했고, 숫자만 믿었다. 조총의 위력, 일본도의 예리함, 사무라이의 실전 경험을 과소평가했다. 넷째, 교만과 방심이었다. 50배의 병력 우위는 독이 되었다. 모두가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경계를 게을리하고, 정찰을 소홀히 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그 교만이 패배를 불렀다. 용인전투는 당시 조선 군사 체제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평시에 군사 훈련을 게을리한 대가, 문신 우위 체제에서 무신을 경시한 대가, 외국 군사력에 대한 정보 수집을 등한시한 대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제9장: 역사의 교훈】 용인전투는 역설적으로 조선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이 치욕적인 패배 이후, 조선 조정은 군사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급조된 대군으로는 왜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후 조선은 소규모 정예 부대, 지역 방어 체계, 의병과의 협력 등 현실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 해군에서는 이순신이 옥포 해전부터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의병장 곽재우, 고경명, 조헌 같은 이들이 곳곳에서 왜군을 괴롭혔다. 용인전투의 패배가 조선 전체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용인전투의 치욕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이 패배는 임진왜란 7년 내내 조선군을 짓눌렀다. "용인의 교훈", "용인을 반복하지 말라"는 말이 장수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종장: 흩어진 군기 앞에서】 1592년 음력 6월 6일의 해가 저물었다. 용인 들판에는 버려진 군기(軍旗)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조선 팔도에서 모인 희망의 상징이었던 그 깃발들은 이제 수치의 증거물이 되어 진흙탕에 뒹굴었다. 5만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숫자가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합지졸은 아무리 많아도 정예 소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교만과 방심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를 용인전투는 잔혹하게 보여주었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이 승리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하게 된다. 1,600으로 5만을 격파한 그 용맹한 장수가, 이순신의 학익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용인전투는 잊힌 전투가 되었다. 임진왜란의 영광스러운 승전들—이순신의 해전들, 진주성 수비전, 행주대첩—에 가려져 역사책에서 작게 다뤄진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 실패에서 배우지 않으면 같은 실패는 반드시 반복된다. 용인, 그 이름은 4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과연 숫자의 환상에서 깨어났는가? 우리는 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는 교만하지 않은가? 그 질문들 앞에서, 용인 들판의 찬바람이 아직도 부는 듯하다.
의의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 최대 참패. 5만 대군이 1,600 왜군에게 궤멸당하며 군사 체제의 문제점 노출.
출처
- 선조실록
- 징비록 (류성룡)
- 난중일기 (이순신)
- 재조번방지
- 연려실기술
- 일본측 진주성 전투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