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성 전투와 송상현의 죽음 (1592년)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불멸의 충절
- 연도: 1592.4.15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
- 장소: 동래성
- 피해: 송상현 전사, 군민 다수 순절
본문
【서장: 부산진의 연기가 피어오르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저녁,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남쪽 하늘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았다. 부산진 방향이었다. "부산진이 불타고 있습니다!" 급보가 잇따라 들어왔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이 전사했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도 전사했다. 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송상현은 42세의 문신이었다. 평안도 도사, 남평현감 등을 거쳐 동래부사가 된 지 1년 반. 그는 무인이 아니라 유학자였다.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가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밤, 그는 무인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에게 구원을 요청하라. 그리고 성 안의 모든 백성에게 알려라. 싸울 준비를 하라." 그러나 구원은 오지 않았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이 함락된 후에야 도착했고, 왜군을 보자마자 도주했다. 조선의 관군 체계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4월 15일 새벽: 검은 파도가 밀려오다】 4월 15일 새벽, 동래성 남문 밖에 왜군이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천, 아니 수만의 병사가 거대한 뱀처럼 성을 향해 밀려왔다. 깃발이 나부꼈다. 북소리가 울렸다. 맨 앞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깃발이 펄럭였다. 송상현은 성루에 올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가 말했다. "부사 어르신, 저 수를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피란하시는 게..." 송상현이 고개를 저었다. "관아를 지키는 자가 관아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나는 이곳에서 죽겠다." 동래성 안의 병력은 정규군과 향군, 그리고 자발적으로 남은 백성들까지 합쳐 약 3,000명. 성 밖 왜군은 부산진 함락 병력과 후속 부대를 합쳐 4만이 넘었다. 【역사적인 목패 교환】 왜군이 성 가까이 접근했다. 그리고 화살 끝에 목패(木牌)를 묶어 성 안으로 쏘았다. 목패에는 한문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전즉전의 불전즉가도)" -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 오만하고 위협적인 요구였다. 조선 땅을 지나 명나라로 가겠다는 것. 병력 수십 배의 우위를 믿은 협박이었다. 송상현은 목패를 받아들고 생각에 잠겼다. 길을 비켜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상현은 붓을 들어 답패를 썼다.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여덟 글자. 이 여덟 글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충절의 선언이 되었다. 송상현은 답패를 화살에 묶어 성 밖으로 쏘게 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외쳤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죽는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조선 팔도에 우리의 기개를 보여주자!" 성 안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생결단의 공방전】 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총 사격이 성벽을 강타했다. '탕탕탕!' 굉음이 들판을 뒤흔들었다. 연이어 화살이 빗발쳤다. 성벽 위의 조선군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조선군은 반격했다. 활시위를 당기고, 돌을 굴렸다. 끓는 물과 뜨거운 모래를 쏟아부었다. 성벽에 접근하는 왜군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던졌다. 왜군은 사다리를 걸었다. 수십 개의 사다리가 동시에 성벽에 걸렸다. 기어오르는 왜병들을 조선군이 창과 칼로 찔러 떨어뜨렸다. 그러나 한 명이 떨어지면 두 명이 올라왔다. 송상현은 성을 돌며 직접 지휘했다. 그는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있었다. 관복을 입고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조선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웠다. 여러 차례 왜군의 돌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화살은 점점 줄어들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성벽이 무너지다】 오후, 결국 성벽 일부가 뚫렸다. 남문 쪽 성벽에서 왜군이 밀려들어왔다.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물밀듯이 쏟아지는 적을 감당할 수 없었다. 거리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송상현은 성루에서 내려와 싸우는 병사들 사이로 걸어갔다. 부하들이 말렸다. "부사 어르신! 위험합니다!" "이미 늦었다. 이제 함께 죽을 뿐이다."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양, 임금이 계신 방향이었다. 그는 멈춰 서서 깊이 네 번 절했다. 조복 차림 그대로였다. "신이 성을 지키지 못했사옵니다. 이 목숨으로 사죄하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 앉았다. 칼을 옆에 놓고, 눈을 감았다. 밀려드는 왜군 속에서 송상현은 꼼짝하지 않았다. 왜병들이 다가왔다. 칼이 번쩍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그렇게 42세의 나이로 순절했다. 【금섬의 죽음】 송상현과 함께 죽은 이가 또 있었다. 그의 애첩 금섬(金嬋)이었다. 금섬은 동래의 관기(官妓)였다. 송상현이 동래부사로 부임한 후 그의 곁을 지켰다. 전투가 시작되자 금섬은 피란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 "대감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이 순절할 때, 금섬은 그 곁에 있었다.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과 금섬의 충절에 감동하여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적장조차 고개를 숙이게 만든 충절이었다. 【비겁한 자들】 모든 이가 송상현처럼 용감했던 것은 아니다.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동래성이 함락된 후에야 병사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는 왜군을 보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다. 병사들도 흩어졌다. 동래성 함락 소식을 들은 경상우병사 조대곤(趙大坤)은 싸우지 않고 성을 버렸다. 경상좌도 순변사 이일(李鎰)은 상주에서 패배한 후 도주했다. 조정의 고위 무관들이 줄줄이 도망치는 와중에, 42세의 문신 송상현은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무인들의 부끄러움, 문신의 충절.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종장: 여덟 글자의 울림】 "戰死易 假道難" 이 여덟 글자는 임진왜란 7년을 관통하는 저항의 구호가 되었다. 송상현의 순절 소식이 조선 팔도에 전해지자,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관군이 무너지고 임금이 도망칠 때, 백성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었다. 그 저항 정신의 첫 불씨가 송상현의 죽음이었다. 송상현의 시신은 후에 찾아져 고향인 서흥에 장사 지내졌다. 그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충렬공(忠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동래에는 그를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세워졌다. 430년이 지난 지금도 동래 충렬사에는 향불이 피어오른다. 매년 임진왜란 순국선열 추모 행사가 열린다. "전사이 가도난" -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그 여덟 글자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송상현은 몸으로 대답했다.
의의
임진왜란 초기 핵심 전투. 송상현의 충절은 의병 봉기의 정신적 기둥이 됨.
출처
- 선조실록
- 징비록 (류성룡)
- 동래읍지
- 송충렬공유사
- 난중잡록
- 동래부순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