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진 함락과 7년 전쟁의 서막 (1592년)
왜군 15만 대군의 침략 시작. 7년 지옥의 문이 열리다
- 연도: 1592.4.13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장소: 부산진
- 피해: 정발 전사, 수비대 전멸
본문
【서장: 폭풍 전의 고요】 서기 1592년(선조 25년), 조선은 200년의 평화에 젖어 있었다. 세종대왕 이후 문치(文治)의 전통이 이어지며,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교양 있고 문명화된 나라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평화의 대가로 칼은 녹슬고, 군사 훈련은 형식에 그쳤다. 반면 바다 건너 일본은 100년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막 끝낸 참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 속에서 수백만 명의 사무라이가 단련되었고,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전장을 뒤바꿔놓았다. 그 전국시대를 통일한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히데요시의 야망은 일본 통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을 정복하고, 명나라까지 집어삼키겠다는 광기 어린 계획을 세웠다. '가도입명(假道入明)' - 조선에게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였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히데요시는 전쟁을 결심했다. 1592년 음력 4월, 나고야(名護屋)에 집결한 일본군 총병력 15만 8천. 700척의 함선에 분승한 그들은 대마도를 거쳐 조선을 향했다. 선봉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8천,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2만 2천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새벽: 검은 수평선】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로 추정), 부산 앞바다에 새벽안개가 자욱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은 이른 아침 성루에 올랐다. 48세의 노장이었다. 그는 무인 출신으로 올곧은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날 아침도 평소와 다름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발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수평선을 가득 메운 검은 점들. 처음에는 새떼인가 싶었다. 그러나 점들이 다가올수록 정체가 드러났다. 배였다. 수백 척의 배가 부산포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적... 적선이다! 왜선이다!" 봉화가 올랐다. 북이 울렸다. 성 안이 비상에 걸렸다. 병사들이 뛰어나왔다. 그러나 부산진성에 있는 병력은 정규군과 향군을 합쳐도 1,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 부대가 부산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한 상륙이었다. 100년 전쟁을 통해 숙달된 일본군의 기동력이 드러났다. 【절망적인 저항】 정발은 곧바로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그는 성문을 굳게 닫고 병력을 성벽에 배치했다. "아무도 물러서지 마라!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왜적이 조선 팔도를 유린할 것이다!" 그러나 전력 차이는 너무 컸다. 고니시의 선봉만 해도 1만 8천. 부산진 수비대의 18배였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총 사격이 먼저 울려 퍼졌다. '탕! 탕! 탕!' 조선의 병사들은 이 소리를 처음 들었다. 성벽 위에 있던 병사 여럿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조선군은 활로 맞섰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몇몇 왜병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 뒤에서 더 많은 왜병이 몰려왔다. 조총과 활의 대결이었으나, 수의 차이가 결정적이었다. 왜군은 사다리를 걸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조선군은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쏟아부었다. 처절한 공방이 이어졌다. 정발은 직접 말을 타고 성 안을 돌며 지휘했다. "물러서지 마라! 죽더라도 여기서 죽어라!" 【정발의 최후】 전투가 시작된 지 반나절. 성벽 여러 곳이 뚫리기 시작했다. 왜군이 성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거리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정발은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갑자기 가슴에 충격이 느껴졌다. 조총탄이 그의 가슴을 뚫은 것이다. 말에서 떨어진 정발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부하들이 달려왔다. "첨사 어르신!" 정발이 손을 들어 그들을 밀쳤다. "나를 버리고 싸워라... 성을... 지켜라..." 그러나 이미 성은 무너지고 있었다. 정발은 피를 흘리며 다시 일어섰다. 한 손으로 칼을 잡고 덤벼드는 왜병과 싸웠다. 그리고 또 다른 조총탄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성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다대포성과 동래성】 부산진이 함락되는 같은 날, 인근 다대포진성도 공격받았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은 왜군의 상륙을 보고받고 즉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대포의 병력은 부산진보다도 적었다. 500명도 되지 않았다. 윤흥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싸웠다. "물러날 곳이 없다! 여기가 우리 땅 끝이다!" 왜군의 물결이 성벽을 넘었다. 윤흥신은 최후의 순간까지 칼을 놓지 않았다. 그도 정발처럼 성과 함께 산화했다. 다음날인 4월 15일, 왜군 선봉이 동래성에 도착했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목패(木牌)를 보냈다.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송상현은 즉시 답패를 보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문장이었다.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 동래성도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북쪽 임금이 계신 방향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순절했다. 그와 함께 관기(官妓) 금섬(金嬋)도 목숨을 끊었다. 부산진에서 동래까지, 조선의 남쪽 관문이 이틀 만에 무너졌다. 【파죽지세의 북진】 부산진 함락 이후 왜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4월 17일, 밀양 함락. 4월 18일, 청도 함락. 4월 20일, 대구 함락. 4월 25일, 인동(구미) 함락. 4월 26일, 상주 전투 - 경상좌도 순변사 이일(李鎰) 패배.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 - 도순변사 신립(申砬) 전사, 8천 관군 전멸. 파죽지세였다. 왜군의 조총과 백병전 능력은 조선군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200년간의 평화가 낳은 허약한 군대는 전국시대를 통해 단련된 일본군 앞에서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4월 30일, 충주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백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밤중에 도망친 것이다. 5월 3일, 왜군 선봉이 텅 빈 한양에 입성했다. 부산 상륙 20일 만이었다. 【종장: 7년 지옥의 서막】 부산진 함락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첫 페이지였다. 정발은 조선이 왜군에게 상대한 첫 번째 장수였고, 동시에 첫 번째 순국자였다. 그의 죽음은 앞으로 7년간 이어질 수십만 조선인의 죽음의 서막이었다. 1,000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1만 8천 대군을 맞서 싸운 정발. 그는 패배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의 저항은 조선 각지의 의병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임진왜란 7년간 조선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경작지의 3분의 2가 황폐화되었다. 수천 권의 서적과 수백 개의 사찰이 불탔다. 도자기 장인 수만 명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 1592년 4월 13일 부산진이었다. 정발의 위패는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부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정발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430년 전 그날, 조선의 남쪽 관문에서 나라를 위해 처음으로 피를 흘린 사람.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부산진이 함락된 4월 13일. 그날은 7년 지옥의 문이 열린 날이었다.
의의
임진왜란의 시작.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첫 전투.
출처
- 선조실록
- 징비록 (류성룡)
- 난중일기 (이순신)
- 쇄미록 (오희문)
- 부산진순절도
- 일본측 조선정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