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함락과 북진의 끝 (1592년) 역사 자료 이미지

평양성 함락과 북진의 끝 (1592년)

조선 제2의 도시까지 함락. 임금이 압록강까지 쫓기다

  • 연도: 1592.6.15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
  • 장소: 평양
  • 피해: 평양 점령, 선조 의주까지 피란

본문

【서장: 도망치는 왕】 1592년 음력 5월, 선조(宣祖)의 피란 행렬은 참담했다. 한양을 버리고, 개성을 버리고, 이제 평양마저 버려야 할 상황이었다. 왜군이 쉬지 않고 북상하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 가토 기요마사의 본대가 한반도를 관통하며 올라왔다. 선조는 평양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평양은 고구려의 옛 도읍이자 조선의 서경(西京). 한양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왜적이 황해도를 돌파했습니다. 곧 평양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시 도망가야 했다. 어디로? 의주(義州)밖에 없었다. 조선 땅의 끝, 압록강 건너에 명나라가 보이는 그곳.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떠났다.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또 밤중에 몰래 도망쳤다. "임금이 또 도망갔다!" 평양 백성들의 분노가 터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양처럼 불을 지르지 못했다. 왜군이 너무 빨리 다가왔기 때문이다. 【6월 15일: 평양성 함락】 1592년 음력 6월 15일(양력 7월 23일경),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이 평양성 앞에 도착했다. 성문은 열려 있었다. 방어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관군 대부분이 임금을 따라 북으로 도망갔거나, 왜군이 온다는 소식에 흩어져버렸다. 왜군은 무혈입성하다시피 평양을 점령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대동문을 통해 입성했을 때, 그가 본 것은 텅 빈 거리와 버려진 집들이었다. "조선의 서경이라더니, 이렇게 쉽게 빠지다니." 고니시는 평양 감영에 들어가 본영을 세웠다. 히데요시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개전 55일 만에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한반도의 거의 전부를 두 달 만에 장악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북진의 끝】 그러나 평양은 왜군 북진의 종착점이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보급선의 문제였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1,000리가 넘는 거리. 그 긴 보급로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왜군은 육로로만 보급을 받아야 했고, 그것은 느리고 불안정했다. 둘째, 의병의 봉기였다. 왜군이 점령한 지역 곳곳에서 조선 백성들이 무기를 들었다. 곽재우가 의령에서, 조헌이 옥천에서, 고경명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들은 왜군의 보급로를 끊고, 후방을 교란했다. 왜군은 점령지를 유지하는 데만도 힘에 부쳤다. 셋째, 명나라의 개입이었다. 선조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처음에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으나, 조선 전역이 왜군에게 점령되면 중국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 본격적인 파병을 결정했다. 넷째, 왜군 자체의 문제도 있었다. 빠른 진격에 병사들은 지쳐 있었다. 질병이 퍼졌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추위도 문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혹한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 머물며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조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하기도 했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평양에서의 왜군】 평양을 점령한 왜군은 약탈과 만행을 자행했다. 식량을 약탈하고, 가옥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학대했다. 피란 가지 못한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범죄가 심각했다. 문화재도 파괴되었다. 평양은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역사적 유물이 많았다. 그 상당수가 왜군에 의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서 겨울을 보냈다. 명나라 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긴장했으나, 첫 번째 명군은 규모가 작았고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93년 1월,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평양성 탈환 (1593년 1월)】 1593년 음력 1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4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도착했다.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성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1월 8일, 명군과 조선군 연합이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여송은 대포를 동원하여 성벽을 포격했다. 화약 무기의 위력에서 명군은 왜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성벽 여러 곳에서 공방전이 벌어졌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용감히 방어했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1월 9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을 포기했다. 왜군은 밤중에 성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후퇴했다. 7개월간 왜군이 점령했던 평양이 탈환된 것이다. 그러나 평양성 탈환 직후,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패배하면서 추격이 중단되었다. 왜군은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했고,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선조의 의주 피란】 평양이 함락된 후, 선조는 어디로 갔을까? 선조는 평양을 떠나 정주, 영변을 거쳐 끝없이 북으로 달렸다. 마침내 도착한 곳이 의주였다. 의주는 조선 땅의 끝이었다. 압록강 건너에 명나라 요동이 보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명나라로 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의주에서 명나라에 원군을 간청했다. 동시에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겨 남쪽에서 저항을 계속하게 했다. 의주에서의 선조는 초라했다. 왕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식량도 부족했고, 신하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구걸하듯 원군을 청했다. 그 치욕의 기간이 1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종장: 최북단의 굴욕】 평양성 함락과 선조의 의주 피란은 임진왜란 중 조선이 가장 깊이 밀린 순간이었다. 수도 한양이 함락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제2의 도시 평양마저 빼앗긴 것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임을 보여주었다. 임금이 국경 끝까지 쫓겨간 것은 국가적 치욕이었다. 그러나 그 최악의 순간에서도 조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를 지켰다. 의병들이 후방을 교란했다. 명나라 원군이 왔다. 그리고 평양은 탈환되었다.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평양성 함락은 끝이 아니라 전환점이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이 지나면 새벽이 온다. 1593년 1월, 평양 탈환과 함께 조선의 새벽이 밝아왔다. 물론 전쟁은 그로부터 5년이나 더 계속되었다. 수십만 명이 더 죽어야 했다. 그러나 평양 이북으로 왜군이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430년이 지난 지금, 평양은 여전히 한반도 북부의 중심 도시이다. 그러나 그곳에 깃든 1592년 여름의 슬픔과 치욕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던 그날을. 그리고 다시 일어섰던 그 의지를. 그것이 평양성 함락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의의

임진왜란 왜군 북진의 정점. 이후 전세 역전의 시작점.

출처

  • 선조실록
  • 징비록 (류성룡)
  • 명사
  • 선조수정실록
  • 난중일기 (이순신)
  • 기효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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