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산 전투와 조헌 의병의 순절 (1592년)
칠백의총의 전설.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의 충혼
- 연도: 1592.8.18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 장소: 충남 금산
- 피해: 조헌, 영규, 의병 700명 전원 순절
본문
【서장: 우국지사 조헌】 조헌(趙憲, 1544~1592).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峰). 그는 기이한 사람이었다. 조선의 문신이면서 무예를 익혔고, 유학자이면서 불교 승려와 교류했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끊임없이 직언을 올렸다. 1574년 율곡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그의 진면목은 직언에 있었다. 폐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다. 그 때문에 여러 차례 파직당하고 유배를 갔다. 특히 그는 일본의 침략을 예견했다. 1591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이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조정은 이를 무시했다. 조헌은 분노했다. 그는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라.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참화를 입을 것이다." 조정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했다. 상소는 불태워졌다. 조헌은 낙향했다. 그리고 1년 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의병의 봉기】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조헌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는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관군이 무너지고 임금이 도망가는 와중에, 한 유학자가 칼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의 명성을 듣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함께 싸우자. 죽더라도 왜적을 물리치자!" 농민, 유생, 천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인 의병이 수천 명에 달했다. 같은 시기, 영규대사(靈圭大師)도 승병(僧兵)을 일으켰다. 영규는 청주 공산성에서 수도하던 승려로, 불교 승려이면서 무예에 뛰어난 이였다. 그가 이끄는 승병 700명도 왜적과 싸우기 위해 일어났다. 조헌과 영규는 연합했다. 유교와 불교, 유생과 승려가 힘을 합친 것이다. 조선시대 어깨동무처럼 드문 일이었으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그 벽은 무너졌다. 【청주성 탈환】 조헌과 영규의 연합 의병은 먼저 청주성 탈환에 나섰다. 1592년 8월, 청주성은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왜군의 수는 약 1천여 명. 조헌의 의병과 영규의 승병, 합쳐서 약 2천 명이 공격에 나섰다. 8월 1일, 청주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싸움은 치열했다. 의병들은 정규 훈련을 받지 못한 농민과 유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는 높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헌이 선봉에 섰다. 48세의 나이에도 직접 칼을 휘둘렀다. 영규대사도 승려의 옷 위에 갑옷을 걸치고 싸웠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청주성이 탈환되었다. 왜군은 패주했다. 첫 승리였다. 의병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관군의 지원은 없었다. 경상감사 김수(金睟)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조헌은 분노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관군이 오지 않아도 우리가 싸운다!" 【금산으로 진격하다】 청주성 승리 후, 조헌은 금산(錦山)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금산에는 왜군 대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부대로, 병력이 수천에 달했다. 이곳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참모들이 만류했다. "금산의 왜군은 너무 강합니다. 우리 병력으로는..." 조헌은 고개를 저었다. "금산을 놔두면 왜적이 호남으로 진격한다. 호남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죽더라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금산으로 향하는 도중, 의병 상당수가 이탈했다. 청주성 전투 후 지친 병사들, 관군의 지원이 없다는 것에 실망한 자들, 금산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자들... 하나둘 빠져나갔다. 금산에 도착했을 때, 조헌 곁에 남은 자는 700명뿐이었다. 【8월 18일: 죽음의 결단】 1592년 음력 8월 18일, 조헌의 700의병이 금산의 왜군 진지 앞에 섰다. 왜군 수천 명이 성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승산은 보이지 않았다. 조헌은 병사들을 모아 연설했다. "오늘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왜적을 하루라도 막으면, 그만큼 호남의 백성들이 피란할 시간을 번다. 우리의 피가 이 땅의 거름이 되어 후손들이 살 것이다. 나를 따르겠는가?" "따르겠습니다!" 700명이 일제히 외쳤다. 조헌이 칼을 뽑았다. 영규대사도 염주를 내려놓고 창을 잡았다. "돌격!" 【최후의 전투】 700의병이 왜군 진지로 돌격했다. 조총 사격이 빗발쳤다. 선두의 의병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뒤의 의병들이 시체를 넘어 돌진했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성벽에 닿았다. 사다리가 걸렸다. 의병들이 기어올랐다. 왜군이 창을 휘둘렀다. 피가 튀었다. 비명이 울렸다. 조헌은 성벽 위로 올랐다. 48세의 유학자가 왜병을 베었다. 하나, 둘, 셋... 그의 칼이 피로 물들었다. 영규대사도 성벽에 올랐다. 승복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는 아미타불을 외우며 싸웠다. 그러나 수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의병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포위망이 좁혀졌다. 조헌이 칼에 맞았다. 피가 흘렀다. 그래도 그는 서 있었다. 또 베었다. 또 맞았다. 영규가 쓰러졌다. 조헌도 쓰러졌다. 해가 질 무렵, 전투가 끝났다. 700의병 전원이 전사했다.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았다. 【칠백의총】 전투가 끝난 후, 금산 백성들이 시신들을 수습했다. 들판에 700구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조헌의 유해도 끝내 찾지 못했다. 백성들은 이 시신들을 한 곳에 모아 묻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칠백의총(七百義塚)이다. 700명의 의로운 무덤. 400년이 지난 지금도 금산에는 칠백의총이 있다. 매년 추모제가 열린다. 조헌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문열공(文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위패는 칠백의총에 함께 봉안되어 있다. 【종장: 의(義)의 불꽃】 금산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패배였다. 700명이 전멸했고, 금산의 왜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조헌과 700의병의 희생은 전국에 영감을 주었다. 관군이 도망치고 임금이 피란 가는 와중에, 평범한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소식이 팔도에 퍼졌다. "금산에서 700의병이 전멸했다.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의병이 더 많이 일어났다. 숨어 있던 자들이 칼을 들었다. 조헌의 죽음이 씨앗이 되어 저항의 불꽃이 더 크게 타올랐다. 임진왜란 중 수많은 의병장이 있었다. 곽재우, 고경명, 정인홍, 김천일... 그러나 조헌만큼 결연하게 죽음을 택한 이는 드물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700명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싸웠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기 때문에 싸웠다. 칠백의총의 700혼령은 지금도 금산의 하늘에 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조헌은 칼을 들었다. 그리고 죽었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의의
임진왜란 의병 활동의 상징적 전투. 칠백의총으로 충혼이 기려짐.
출처
- 선조실록
- 중봉집 (조헌 문집)
- 금산읍지
- 의병 관련 자료
- 징비록 (류성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