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과 조선 수군의 궤멸 (1597년) 역사 자료 이미지

칠천량 해전과 조선 수군의 궤멸 (1597년)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의 비극. 160척의 함대가 단 12척만 남다

  • 연도: 1597.7.15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수군
  • 장소: 거제도 칠천도
  • 피해: 조선 수군 거의 전멸, 장수 다수 전사

본문

【서장: 이순신이 사라진 바다】 1597년(선조 30년) 봄, 조선 수군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파직되었다. 옥에 갇혔다. 사형을 면한 것조차 다행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간계였다. 왜군 내부의 첩자를 통해 조선 조정에 거짓 정보가 흘러들어갔다. "가토 기요마사가 특정 시기에 특정 해로로 온다. 그때 이순신이 공격하면 잡을 수 있다." 조정은 이 정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출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군의 함정임을 간파한 것이다. 조정은 "왕명을 거역했다"며 문책했다. 여기에 이순신을 시기하던 자들의 모함이 더해졌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백의종군 명령을 받았다. 그의 후임으로 원균(元均)이 임명되었다. 원균은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이순신의 공을 시기했고, 이순신의 전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순신 같은 지략과 신중함이 없었다. 【비극의 서막: 원균의 출격】 원균이 통제사가 된 후, 조정은 계속해서 출격을 재촉했다. "왜적 수군을 격파하라. 왜 가만히 앉아 있느냐." 원균은 몇 차례 출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실패했다. 부산 앞바다까지 갔다가 풍랑에 막혀 돌아오거나, 별 성과 없이 물러났다. 권율 도원수가 원균을 면전에서 책망했다. "그대는 수군을 이끌면서 한 일이 무엇이냐? 이순신은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지켰는데, 그대는 왜 아무것도 못 하느냐!" 원균은 곤장까지 맞았다. 장수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다. 분노와 굴욕감에 휩싸인 원균은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소극적으로 있을 수 없다. 총출격이다. 1597년 음력 7월 14일, 조선 수군 함대가 부산을 향해 출격했다. 판옥선 약 160척, 병력 약 1만여 명. 이순신이 5년간 피와 땀으로 일군 조선 수군의 전력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출격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7월 15일: 칠천도의 밤】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조선 수군은 왜군 수군과 몇 차례 교전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부를 보지 못했다.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식수가 부족했다. 원균은 후퇴를 명령했다. 함대는 거제도 칠천도(漆川島)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그날 밤, 병사들은 육지에 내려 물을 구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왜군은 쉬지 않았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 일본 수군의 맹장들이 조선 함대를 추격해왔다. 그들은 조선 수군이 칠천도에 정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7월 15일 밤, 왜군 수군 수백 척이 칠천도를 향해 다가왔다. 조선군은 이 사실을 몰랐다. 【새벽의 재앙】 7월 16일 새벽(혹은 15일 밤), 재앙이 닥쳤다. 왜군 수군이 칠천도에 정박 중인 조선 함대를 기습했다. "적이다! 왜적이다!"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조선 병사들 대부분은 배에 없었다. 육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배에 남은 병력만으로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왜군의 화공(火攻)이 시작되었다. 불화살이 빗발쳤다. 정박 중인 조선 함선에 불이 붙었다. 한 척, 두 척, 세 척...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배가 불타고, 병사들이 물에 빠졌다. 헤엄쳐 육지로 도망치려는 자들을 왜군이 추격하며 베었다. 원균은 혼란 속에서 지휘권을 상실했다. 체계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그저 살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다. 160척의 함대가 불타고 침몰했다. 살아남은 배는 거의 없었다. 【장수들의 최후】 그날, 조선 수군의 장수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배 위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도 배와 함께 침몰했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은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그 외 수많은 장수와 병사들이 그날 밤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원균은 달아났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그는 육지로 도주하다가 왜군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다른 기록에서는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정확한 최후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전장에서 도주한 것은 확실하다. 살아남은 자는 경상우수사 배설(裵楔)과 그가 이끄는 12척의 배뿐이었다. 160척 중 12척. 이순신이 5년간 쌓아올린 조선 수군이 하룻밤에 무너졌다. 【호남의 비극】 칠천량 패전의 여파는 즉각적이었다.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왜군은 해상 보급로를 다시 장악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호남 침공을 개시했다. 8월 16일, 남원성 함락. 조명연합군 3,000명 전멸, 민간인 6,000명 학살. 8월 16일, 전주 점령. 전라감영 함락. 8월 말, 호남 전역이 왜군의 손에 떨어졌다. 5년간 조선 수군이 피로 지켜온 호남이 열흘 만에 무너진 것이다. 칠천량의 패전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호남이 짓밟혔다. 곡창지대가 불탔다. 백성들이 학살당했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이순신의 귀환】 조정은 뒤늦게 후회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 급히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다시 내렸다. 이순신이 필요했다. 그만이 수군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이순신은 8월 3일에 통제사 직을 다시 받았다. 그가 인수한 것은 패잔병들과 12척의 배뿐이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유명한 장계의 문장이다. 이순신은 절망하지 않았다. 12척을 가지고도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명량 해협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12척(혹은 13척)의 배로 왜군 수군 133척을 격파했다. 명량대첩이었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죽어간 수천 병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종장: 하나의 교훈】 칠천량 해전은 조선 역사상 가장 처참한 해상 패배였다. 160척의 함대와 수천 명의 병사가 하룻밤에 전멸했다. 그 원인은 명확했다. 첫째, 장수의 무능. 원균은 이순신의 신중함과 지략이 없었다. 적을 무시하고, 정보 수집을 소홀히 하고, 기습에 대비하지 않았다. 둘째, 조정의 무능. 간첩의 거짓 정보에 속아 이순신을 파직하고, 무능한 장수에게 함대를 맡겼다. 셋째, 간계와 기습. 왜군은 조선 수군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밤중에 기습을 감행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탄금대에서 신립이 그랬듯, 칠천량에서 원균이 그랬듯, 자만하고 적을 모르면 패배한다. 그러나 칠천량은 또 다른 교훈도 남겼다. 한 명의 장수가 있느냐 없느냐가 전쟁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순신이 있었다면 칠천량의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돌아왔기에 조선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칠천도 앞바다. 그곳에는 400년 전 그날 밤 불타던 함선들의 혼이 아직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의의

임진왜란 최대의 해전 패배. 이순신 복귀와 명량대첩의 배경.

출처

  • 선조실록
  • 난중일기 (이순신)
  • 징비록 (류성룡)
  • 선조수정실록
  • 원균 관련 기록
  • 일본측 해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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