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 2차 전투와 논개의 순절 (1593년)
임진왜란 최대의 민간인 학살. 남강에 핀 논개의 충절
- 연도: 1593.6.21-29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장소: 진주성
- 피해: 군민 6-7만 명 학살
본문
【서장: 복수의 검은 구름】 서기 1593년 음력 6월, 조선 팔도에는 잠시 전쟁의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명나라 원군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고, 벽제관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한양에서 물러나 남쪽으로 후퇴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 전의 고요였다. 일본 나고야(名護屋)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노에 차 있었다. 조선 침략 1년, 예상과 달리 전쟁은 수렁에 빠졌다. 그 모든 실패의 상징이 바로 진주성이었다. 전년 10월, 불과 3,800명의 조선군이 3만 왜군을 격퇴한 그곳. "진주성을 쓸어버려라. 성 안에 살아있는 것은 개미 한 마리도 남기지 마라." 히데요시의 명령이 조선에 주둔한 왜군 전체에 하달되었다. 6월 초, 조선 땅의 왜군 제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조선 침략의 핵심 왜장들이 모두 진주를 향했다. 동원된 병력은 9만 3천. 남해안에 주둔한 왜군 총병력의 태반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작전이 아니었다. 복수였다. 【1일차 - 6월 21일: 검은 바다가 밀려오다】 1593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0일 추정), 진주성 동쪽 지평선 너머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최경회(崔慶會) 경상우병사가 성루에 올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왜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하나, 둘…" 측근이 깃발 수를 세다가 포기했다. "만(萬)이 넘습니다." 성 안에는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비롯하여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김천일(金千鎰),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창의사 김해(金垓),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장윤(張潤), 이종인(李宗仁), 최철견(崔鐵堅) 등 조선의 장수들이 집결해 있었다. 정규군과 의병을 합쳐 6천여 명. 그리고 왜적을 피해 성 안으로 피난 온 민간인이 5만 명을 넘었다. 총 수비 인원 약 6만. 왜군 9만 3천. 김천일 장군이 성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작년에 김시민 목사께서 3천으로 3만을 막으셨소. 우리도 할 수 있소."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오는 것은 3만이 아니라 10만에 가깝다는 것을. 【2일차 - 6월 22일: 포위망이 완성되다】 왜군의 포위가 완성되었다. 진주성은 동쪽에 촉석루가 있고, 남쪽으로 남강이 흐르며, 북쪽과 서쪽이 육지와 연결된 성이었다. 왜군은 이 모든 방향을 철통같이 봉쇄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동쪽을,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쪽을, 우키타 히데이에가 북쪽을 맡았다. 남강 건너편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수로로의 탈출도 막았다. 그야말로 철옹성 같은 포위망이었다. 왜군 진영에서는 공성 준비가 시작되었다. 거북 등딱지 모양으로 만든 귀갑차(龜甲車)가 조립되었다. 이 수레는 두꺼운 나무 판과 생가죽을 덮어 화살과 돌을 막을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병사들이 성벽 밑까지 접근하여 성벽을 허물 수 있었다. 구름까지 닿을 듯한 긴 사다리인 운제(雲梯), 그리고 성보다 높은 언덕을 인공적으로 쌓는 토산(土山) 축조도 시작되었다. 성 안의 조선군은 긴장 속에 첫 번째 밤을 보냈다.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왜군의 심리전이었다. 【3일차 - 6월 23일: 첫 번째 총공격】 새벽, 왜군의 첫 번째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북문과 동문에서 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수만의 왜군이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조총 사격이 성벽을 때렸다. 철포의 굉음이 들판을 뒤흔들었다. 조선군은 반격했다. 활시위가 빗나가듯 퉁기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끓는 물과 뜨거운 모래가 성벽 아래로 쏟아졌다. 돌이 굴러떨어졌다. 불화살이 귀갑차를 향해 날아갔다. 충청병사 황진이 직접 성루에 올라 지휘했다. "화살을 아끼지 마라! 기름을 더 부어라!" 왜군의 귀갑차 여러 대가 성벽에 접근했으나, 불화살과 끓는 기름에 불타올랐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던 왜병들이 돌에 맞아 떨어졌다. 첫 날의 공격은 실패였다. 왜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성 안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장수들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화살의 절반이 이미 소모되었다. 【4일차 - 6월 24일: 토산이 솟아오르다】 왜군은 정면 돌격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들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성의 동북쪽, 왜군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흙을 가져다 언덕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토산(土山)이었다. 성벽보다 높은 언덕을 쌓아 그 위에서 성 안을 내려다보며 조총 사격을 퍼붓고, 성벽으로 다리를 놓아 직접 침입하려는 것이었다. 조선군은 이를 저지하려 했다. 활을 쏘고, 대포를 쐈다. 그러나 왜군은 막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수천 명이 교대로 흙을 날랐다. 한 명이 쓰러지면 다른 이가 이어받았다. 밤새 토산은 솟아올랐다. 김천일 장군이 이를 보며 탄식했다. "저들의 수효(數效)가 우리를 압도하는구나. 우리가 한 명을 죽여도 열 명이 그 자리를 채우니…" 【5일차 - 6월 25일: 남강의 위협】 왜군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 남쪽 남강에서 작업이 진행되었다. 왜군은 남강의 물을 성벽 기초 쪽으로 끌어대어 성벽의 토대를 약화시키려 했다. 동시에 물길을 막아 성 안으로 들어가는 식수원을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 안의 우물들은 이미 6만 인구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물 배급이 시작되었다. 피난민들 사이에서 불안이 퍼졌다. 아이들이 울고, 노인들이 신음했다. 충청병사 황진이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금만 버텨라! 명나라 원군이 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임을 황진 자신도 알고 있었다. 명군은 오지 않고 있었다. 이날 밤, 여러 장수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탈출의 가능성을 논의했으나, 성 밖 사방이 왜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돌파는 불가능했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항전만이 남았다. 【6일차 - 6월 26일: 토산에서 불벼락이 내리다】 악몽이 현실이 되었다. 동북쪽 토산이 성벽 높이를 넘어섰다. 토산 꼭대기에 왜군 조총 부대가 올라갔다. 그들은 성 안을 내려다보며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이 성벽 위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불화살을 쏘려 몸을 일으키면 조총에 맞았다. 성벽 수비에 큰 차질이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왜군은 토산에서 성벽까지 나무다리를 걸치기 시작했다. 성벽을 오르지 않고도 직접 성 안으로 침투할 수 있는 통로였다. 고종후 의병장이 결사대를 조직했다. "저 다리를 끊어야 한다!" 밤중에 결사대 100여 명이 성벽을 넘어 다리 파괴 작전을 감행했다. 치열한 야간 전투 끝에 다리 일부를 끊는 데 성공했으나, 돌아온 것은 30명도 되지 않았다. 고종후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 【7일차 - 6월 27일: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다】 왜군의 총공세가 재개되었다. 사면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왔다. 동쪽에서는 토산을 이용한 조총 사격과 다리 공격, 북쪽에서는 귀갑차를 앞세운 돌격, 서쪽에서는 운제를 이용한 성벽 등반, 남쪽에서는 강을 이용한 우회 침투 시도. 성벽 여러 곳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며칠간 물을 끼얹은 덕분에 기초가 약해진 것이다. 동쪽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급히 나무와 돌로 막았으나, 왜군은 그 틈을 노렸다. 충청병사 황진이 이 와중에 조총에 맞아 쓰러졌다. "성을… 지켜라…"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주요 지휘관을 잃은 충격이 조선군에 퍼졌다. 이날 밤, 성 안에서는 기도회가 열렸다. 스님들이 독경을 올렸고, 유생들이 사직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많은 이들이 유서를 썼다. 【8일차 - 6월 28일: 마지막 밤】 왜군은 총공격을 하루 멀리 미루었다. 대신 성 안으로 항복 권유문을 쏘아 보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답서를 보냈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왜적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 실제로 성 안의 장수들은 항복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작년 동래성에서 송상현이 항복 거부하고 순절한 것처럼, 그들도 같은 길을 택했다. 이 마지막 밤, 김천일 장군과 아들 김상건(金象乾)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내일이면 끝이겠지요." 김천일이 답했다. "끝이 아니다. 우리의 죽음이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에 불씨가 되어 남을 것이다." 성 안 곳곳에서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울었다. 부부가 서로를 껴안았다. 노인이 손자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만의 사람들이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9일차 - 6월 29일: 성이 함락되다】 1593년 음력 6월 29일 새벽, 왜군의 최후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동쪽 성벽의 균열 부분에 천 명 이상의 왜군이 집중 공격을 가했다. 돌과 흙이 무너져 내렸고, 마침내 성벽에 구멍이 뚫렸다. 왜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적이 성 안에 들어왔다!" 혼전이 시작되었다. 거리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조선군과 의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김천일 장군은 아들 김상건과 함께 촉석루로 향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들은 촉석루에 올라 남강을 바라보다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졌다. 고종후는 중상을 입은 몸으로도 검을 휘둘렀다. 결국 왜군의 칼에 쓰러졌다. 최경회는 마지막까지 병사들을 독려하다가 포위되어 전사했다. 거의 모든 장수가 죽음을 맞이했다. 【대학살: 인간의 악마성】 성이 함락된 후, 진정한 비극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은 명확했다. "진주성의 모든 것을 쓸어버려라." 왜군은 이 명령에 충실했다. 9일간의 공성전에서 수천 명의 동료를 잃은 왜군은 분노에 불타 있었다. 그들에게 성 안의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이었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무차별 살육이 벌어졌다. 군인도, 민간인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아이도 가리지 않았다. 칼이 휘둘러졌고, 창이 찔렸다. 비명과 함성이 진주성을 뒤덮었다. 피가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어떤 왜군은 머리를 베어 수급(首級)으로 삼았다.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이들은 귀를 베었다. 나중에 '귀무덤(耳塚)'으로 일본에 보내질 것들이었다. 산 사람의 귀와 코가 잘려나갔다. 여자들은 더 참혹한 운명을 겪었다. 겁탈과 살해가 동시에 벌어졌다. 일부는 노예로 끌려갔다. 아이 옆에서 어머니가 살해되었다. 어머니 품에서 아이가 창에 찔렸다. 도망치려던 사람들은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강 건너편에도 왜군이 있었다. 강을 건너려던 이들은 조총에 맞거나 화살에 쓰러졌다. 남강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시체가 강물 위를 떠다녔다. 학살은 9일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성 안 구석구석을 뒤져 숨은 사람들을 끌어냈다. 지하 창고에 숨은 사람들, 우물 속에 숨은 사람들, 시체 더미 아래 숨은 사람들… 모두 끌려 나와 살해당했다. 죽은 자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료마다 기록이 다르다. 6만, 7만, 어떤 기록은 10만까지 추정한다. 확실한 것은 성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논개: 남강에 핀 충절의 꽃】 학살의 와중에 한 여인의 전설이 탄생했다. 논개(論介)는 최경회의 소실(小室) 혹은 진주 관기(官妓)였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신분은 기록마다 다르나, 그녀의 행동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성이 함락된 후, 왜군 장수들은 촉석루에서 승리의 연회를 벌였다. 술과 음악, 그리고 조선 여인들이 동원되었다. 논개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가장 화려하게 치장했다. 비녀를 꽂고, 고운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큼직한 반지를 끼었다. 그리고 왜군 장수 중 한 명, 케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에게 다가갔다. 논개는 그를 유혹하여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이라 불리는 바위로 이끌었다. 술에 취한 왜장은 그녀를 따라갔다.

강물이 바위 아래로 흘렀다. 순간이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았다. 열 손가락의 반지가 서로 맞물렸다. 왜장이 뿌리치려 했으나, 반지 낀 손가락은 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남강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강물이 두 사람을 삼켰다. 왜장은 허우적거렸으나 논개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논개의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물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종장: 핏빛 강의 교훈】 진주성 2차 전투가 끝났다. 성은 폐허가 되었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피 냄새가 수십 리 밖까지 퍼졌다. 왜군조차 차마 성 안에 머물지 못하고 물러났다. 왜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9만 대군 중 2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6만에서 7만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군인은 1만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이었다. 전쟁을 피해 성 안으로 피란 왔던 사람들이었다. 진주성 학살은 임진왜란 7년 중 가장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아시아 역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전쟁 범죄였다. 그러나 진주성의 항전은 헛되지 않았다. 9일간의 처절한 저항이 왜군의 사기를 꺾었다. 왜군은 진주성 함락 후에도 호남으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포기했다. 병력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호남의 곡창지대는 전쟁 끝까지 조선 측의 손에 남았다.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그들은 진주성과 함께 산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새겨졌다. 충렬사(忠烈祠)와 창렬사(彰烈祠)에 그들의 위패가 모셔졌다. 논개의 전설은 민간에 널리 퍼졌다. 그녀가 투신한 바위는 의암(義巖, 의로운 바위)이라 불리게 되었다. 촉석루는 조선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진주성 2차 전투는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처절한 비극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것은 외세 침략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기록이자, 끝까지 저항한 우리 선조들의 투혼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강 물은 여전히 흐르고, 촉석루는 여전히 서 있다. 430년 전 그날의 함성과 비명이 아직도 그곳에 메아리치는 듯하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잊어서는 안 된다. 진주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의의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 9일간의 처절한 항전과 논개 순절의 전설 탄생.
출처
- 선조실록
- 징비록 (류성룡)
- 의암별기
- 진주읍지
- 난중잡록
- 재조번방지
- 일본측 진주성 전투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