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1차 전투와 김시민의 승리 (1592년) 역사 자료 이미지

진주성 1차 전투와 김시민의 승리 (1592년)

3,800명이 3만 왜군을 격퇴한 기적. 호남을 지킨 피의 항전

  • 연도: 1592.10.5-10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 장소: 진주성
  • 피해: 김시민 전사, 왜군 격퇴

본문

【서장: 호남의 관문】 1592년 음력 10월, 임진왜란 발발 6개월.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왜군은 한양과 평양까지 점령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에 해상 보급로가 차단되고,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면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왜군 수뇌부의 눈이 호남(湖南), 즉 전라도로 향했다. 호남은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군량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이순신 수군의 후방 기지를 없앨 수 있었다. 왜군에게 호남은 반드시 장악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호남으로 가는 길목에 진주성(晉州城)이 있었다. 진주는 경상우도의 수부(首府)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돌파하지 않고는 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진주성을 지키는 자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35세의 젊은 무장이었다. 【김시민이라는 사나이】 김시민은 천안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지방관을 거쳐 진주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진주목사가 도주하면서 그가 실질적인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달랐다. 다른 관리들이 도망칠 때, 그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성벽을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하고, 병사를 훈련시켰다. 화포와 불화살을 대량으로 제조했다. 조총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싸웠다. 임란 초기 합천, 의령, 함안 등지에서 왜군과 수차례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용맹함과 지략이 병사들 사이에 퍼졌다. 진주의 백성들은 그를 믿었다. 9월, 진주목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마침내 그는 진주성 방어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10월 4일: 검은 파도가 밀려오다】 10월 초, 왜군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의 부대 3만이 진주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관리와 백성들이 피란을 떠났다. "진주성이 버틸 수 있겠는가?"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3만 대군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그러나 김시민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호남이 무너지고,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 나는 이곳에서 죽겠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관군 800명과 의병, 그리고 성 안에 남은 백성들을 합쳐 약 3,800명. 적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10월 5일, 왜군이 진주성 앞에 나타났다. 【6일간의 사투: 1일차 - 10월 5일】 왜군이 성을 포위했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만만했다. 탄금대에서 조선 최고의 장수 신립을 격파했고, 한양을 점령했으며, 평양까지 밀어붙였다. 조그만 지방 성 하나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왜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벽으로 돌진했다. 진주성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이 쏟아졌다. 보통 화살이 아니었다. 불화살이었다. 화약을 이용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도 날아갔다. '꽝!' 폭발음과 함께 왜병들이 쓰러졌다. 조총에 익숙한 왜군도 이 폭발에는 당황했다. "뭐야, 저게 뭐야!" 김시민이 직접 만든 개량 화기들이었다. 그는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화포와 폭발물을 연구했다. 그 결과물이 이 순간 빛을 발했다. 첫날 공격을 물리쳤다. 왜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고 물러났다. 【2일차~3일차: 밀고 당기기】 왜군은 놀랐다. 이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는 성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전술을 바꿨다.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남문, 북문, 동문을 번갈아 공격하며 수비대를 분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김시민은 더 빨랐다. 그는 직접 말을 타고 성을 돌며 병력을 배치했다. 위급한 곳에는 직접 달려가 싸웠다. 군중의 화살이 빗발칠 때 그는 앞장서서 적을 쏘았다. "목사 어르신이 저기 계신다!"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장군이 앞에서 싸우는데 누가 물러설 수 있겠는가. 진주의 백성들도 모두 전투에 참가했다. 남자들은 성벽에서 싸웠고, 여자들은 돌을 나르고 밥을 짓고 부상자를 간호했다. 관기(官妓)들까지 참전했다. 진주 관기들은 적에게 끓는 물을 붓고, 돌을 던졌다. 3일간의 공방 끝에 왜군은 다시 물러났다. 손실이 너무 컸다. 【4일차~5일차: 최후의 돌격 준비】 왜군 진영에 긴장이 감돌았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까짓 조그만 성을 못 넘단 말이냐! 내일은 총공격이다!" 왜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한 총공격을 준비했다. 사다리를 제작하고, 귀갑차를 조립했다.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겠다는 계획이었다. 한편, 성 안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다. 화살이 줄어들고 있었다. 화약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5일간 싸우면서 사상자도 상당했다. 김시민은 병사들을 모아 연설했다. "내일이 고비다. 왜적은 반드시 총공격을 걸 것이다. 우리가 이겨야 호남이 산다. 우리가 지면 조선이 망한다. 내가 앞장서겠다. 나를 따르라!" "따르겠습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6일차 - 10월 10일: 결전】 10월 10일 새벽, 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3만 대군이 일제히 성벽으로 돌격했다. 사다리가 성벽에 걸렸다. 귀갑차가 성문을 들이받았다. 조총 사격이 연속으로 울렸다. 성벽 위에서 조선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끓는 물, 기름, 돌, 불화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성벽 여러 곳에서 왜병이 기어올라왔다. 백병전이 벌어졌다. 피가 튀었다. 비명이 울렸다. 김시민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 그때, 김시민의 이마에 조총탄이 맞았다. "목사 어르신!" 부하들이 달려왔다. 김시민이 쓰러졌다.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곧 일어났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싸워라..."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김시민은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 【승리】 해가 질 무렵, 왜군이 물러났다. 3만 대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진주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3,800명이 3만을 격퇴한 것이다. 성 안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였다. 살아남았다. 이겼다. 그러나 김시민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조총탄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 며칠 간 치료를 받았으나, 11월 18일(혹은 10월 18일, 기록에 따라 다름) 결국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세. 【종장: 호남을 지킨 피】 진주성 1차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김시민이 피로 지킨 진주성 덕분에 호남은 살았다. 호남이 살았기에 이순신의 수군이 계속 활동할 수 있었고, 곡창지대가 유지되어 조선이 버틸 수 있었다. 진주성의 승리는 단순한 전술적 성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전체의 사기를 살린 희망의 신호였다. "진주성이 이겼다!" 이 소식은 팔도에 퍼졌다. 도망치던 관군이 멈추었다. 의병이 더 많이 모였다. 희망이 피어났다. 김시민에게는 선무공신 1등공신과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를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진주에 세워졌다. 그러나 진주성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1593년 6월, 왜군 9만 3천이 진주성을 향해 몰려왔다. 1차 전투의 복수전이었다. 그것이 진주성 2차 전투였다. 촉석루는 여전히 남강을 굽어보고 있다. 김시민의 이름은 그 강물처럼 영원히 흐른다. 호남을 지킨 장군. 3,800의 기적을 이끈 사나이. 김시민.

의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 호남 방어의 결정적 승리로 전세 역전의 발판 마련.

출처

  • 선조실록
  • 징비록 (류성룡)
  • 진주읍지
  • 김시민 전기
  • 난중잡록
  •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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