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함락과 선조의 피란 (1592년) 역사 자료 이미지

한양 함락과 선조의 피란 (1592년)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치욕.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다

  • 연도: 1592.4.30-5.3
  • 시대: 조선
  • 상대: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
  • 장소: 한성(서울)
  • 피해: 왕실 피란, 궁궐 방화, 도성 약탈

본문

【서장: 공포의 파문】 1592년 음력 4월 29일, 충주 탄금대에서 급보가 한양에 도착했다. "전군 전멸. 신립 장군 전사." 조정이 얼어붙었다. 믿을 수 없었다. 천하무적 신립이 죽다니? 8천 정예 기병이 전멸하다니? 류성룡(柳成龍)이 홀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전하, 이제 왜적을 막을 군사가 없사옵니다. 피란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선조(宣祖)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피란이라... 그게 가능한가?" "지금 떠나시지 않으면 왜적이 먼저 도착할 것입니다." 대신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이는 한양을 사수하자 했고, 어떤 이는 강화도로 가자 했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도망이었다. 【4월 30일 밤: 어둠 속의 도주】 1592년 음력 4월 30일, 그믐밤. 달도 뜨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삼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 선조가 창덕궁을 나섰다. 왕비 의인왕후, 세자 광해군, 후궁들과 종친들이 뒤따랐다. 대신 중 일부만이 수행했다. 행렬은 비밀스러웠다.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니, 알릴 수 없었다. 임금이 도망친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 수 있단 말인가.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리만 울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200년 조선의 도읍이 저기 있었다. 경복궁이, 종묘가, 한양의 백성들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왕의 행렬은 진흙탕 속을 걸었다. 의인왕후가 가마 안에서 울었다. 세자 광해군은 묵묵히 걸었다. 새벽, 행렬이 벽제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밝아왔다. 선조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양 방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궁궐이 불타고 있었다. 【5월 1일: 분노의 화염】 선조가 도망친 다음 날 아침, 한양 백성들은 성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무슨 일인가. 성안으로 들어가려던 상인들이 웅성거렸다. 소문이 퍼졌다. "왕이 도망갔다." "대신들이 다 도망갔다." 믿을 수 없었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고? 백성들이 궁궐로 몰려갔다. 경복궁 광화문 앞에 인파가 모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임금은 정말로 도망간 것이다. "이런 임금이 어디 있느냐!" 분노가 폭발했다. 누군가 돌을 던졌다. 다른 이가 횃불을 들었다. 군중의 분노는 통제불능이 되었다. 경복궁에 불이 났다. 창덕궁에도 불이 붙었다. 창경궁도 불탔다. 조선 왕조 200년의 상징인 궁궐들이 민중의 분노 속에 화염에 휩싸였다. 장례원(掌隷院)에도 불이 났다. 장례원은 노비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불이 활활 타오르며 노비 문서가 재로 변했다. 누가 의도적으로 불을 질렀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많은 노비들이 그 불길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형조(刑曹)에도 불이 붙었다. 죄수 명부가 불탔다. 감옥의 문이 부서졌다. 죄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양은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5월 3일: 왜군 입성】 불타는 한양에 왜군 선봉이 도착한 것은 5월 3일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숭례문(남대문) 앞에 섰다. 성문은 열려 있었다. 아무도 막는 이가 없었다. 왜군은 어리둥절했다. 이게 조선의 수도란 말인가? 왜병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곳곳에 불탄 자국과 약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향했다. 근정전은 무사했다. 모든 건물이 불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 왕의 옥좌에 앉아 전승 보고를 작성했다. "개전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를 점령했습니다." 나고야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보고를 받고 환호했다.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조선은 종이호랑이였다. 【피란길의 고난】 피란길에 오른 선조의 행렬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개성에 잠시 머물렀으나, 왜군 추격 소식에 다시 북으로 달렸다. 평양에 도착했으나, 거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왜군이 여전히 북상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임금이 지나가면 돌이 날아왔다. 욕설이 쏟아졌다. "어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느냐!" "그래도 임금이냐!" 임진강을 건널 때였다. 선조는 배에 올랐다. 그러나 뒤따르던 백성들과 병사들은 배에 태워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뒤에 남은 배를 불태워버렸다. 왜군이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으나, 결과적으로 수많은 백성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왜군에게 당했다. 선조의 행렬은 점점 초라해졌다. 대신들은 하나둘 낙오했다. 식량이 떨어졌다. 어떤 날은 임금도 죽을 먹어야 했다. 평양도 안전하지 않았다. 결국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압록강 건너 명나라 땅이 보이는 곳. 조선의 끝이었다. 명나라로 망명할 것인지 논의되었다.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분조(分朝)의 설치】 절망의 순간에 류성룡이 건의했다. "전하, 세자를 남쪽에 보내어 의병을 규합하게 하소서. 조정이 분열되면 백성의 희망이 됩니다." 분조(分朝)가 설치되었다. 세자 광해군이 조정의 일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백성들은 세자의 행렬을 보며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었다. 광해군은 피란 중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의병을 격려하고, 군량을 모으고, 지방관들을 독려했다. 아버지가 도망가는 동안 아들은 싸우고 있었다. 이 경험은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높였다. 훗날 그가 왕위에 오른 것도 임진왜란 중의 활약 덕분이었다. 【종장: 왕이 버린 나라, 백성이 지키다】 한양 함락과 선조의 피란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알리지도 않고, 밤중에 몰래 도주했다. 궁궐에는 불이 났고, 백성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치욕이 조선을 구했다. 왕이 도망간 자리를 백성들이 채웠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곽재우, 조헌, 고경명, 정인홍...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농민과 천민들이 무기를 들었다. "나라가 우리를 버렸지만, 우리는 나라를 버리지 않겠다."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를 지켰다. 해상 보급로가 차단되자 왜군의 진격이 멈췄다. 의병들이 후방을 교란했다. 명나라 원군이 도착했다. 조선은 살아남았다. 한양은 2개월 만에 조선군과 명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7년이나 더 계속되었다. 선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역사는 묻는다. 왕이 백성을 버릴 때, 나라는 누가 지키는가? 임진왜란은 답했다. 백성이 지킨다. 그것이 1592년 5월, 불타는 한양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의의

조선 수도의 함락. 왕의 피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동시에 의병 봉기의 계기.

출처

  • 선조실록
  • 징비록 (류성룡)
  • 쇄미록 (오희문)
  • 난중잡록
  • 선조수정실록
  • 연려실기술

관련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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