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과 상흔의 산하 (1950년) 역사 자료 이미지

6.25 전쟁과 상흔의 산하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 3년간 한반도가 불바다가 되다

  • 연도: 1950.6.25-1953.7.27
  • 시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상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인민지원군
  • 장소: 한반도 전역
  • 피해: 남한 사망 약 100만, 북한 측 250만 이상, 민간인 사망자 수백만

본문

【서장: 분단의 씨앗】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그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재앙이 아니었다. 5년 전 심어진 분단의 씨앗이 싹튼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북쪽에는 소련의 후원을 받는 김일성 정권이, 남쪽에는 미국의 후원을 받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두 정권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둘 다 한반도 전체의 유일 합법 정부를 자처했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1949년부터는 국지적인 충돌이 빈번했다. 김일성은 무력 통일을 꿈꿨다. 그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설득하여 남침 허락과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중국 내전에서 귀환한 조선인 부대로 전력을 강화했다.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외쳤으나, 실제 군사력은 열세였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켰고, 한국군에게 탱크나 전투기를 주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6월 25일~28일: 파죽지세】 전쟁은 시작부터 일방적이었다. 북한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T-34 탱크 242대, 전투기 약 180대, 병력 약 20만 명. 반면 한국군은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고, 병력은 10만 명 남짓이었다. 북한군의 탱크가 38선을 넘었다. 한국군의 대전차 무기는 탱크를 뚫지 못했다. 포탄이 튕겨 나갔다. 병사들이 공포에 질렸다. "탱크다! 탱크가 온다!" 방어선이 무너졌다. 춘천 방면에서는 일시적으로 저지에 성공했으나, 동두천-의정부 방면이 뚫리면서 서울 방어가 불가능해졌다. 6월 27일 새벽, 이승만 정부가 서울을 탈출했다. 그리고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아직 수많은 시민과 군인이 강 북쪽에 있는 상태에서. 폭파로 500~800명이 사망했고, 수만 명의 군인이 강을 건너지 못해 포로가 되거나 고립되었다.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개전 3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었다.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보루】 한국군과 미군은 계속 후퇴했다. 대전, 대구... 밀리고 또 밀렸다. 8월이 되자 유엔군(미군 중심)과 한국군은 낙동강 저지선으로 물러났다. 부산 주변의 작은 교두보만 남았다. 여기가 뚫리면 한반도에서 밀려나는 것이었다. "We must hold or die!(지켜야 한다, 아니면 죽는다!)" 워커 장군의 명령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처절한 공방이 벌어졌다. 다부동, 영산, 마산...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특히 다부동 전투에서 한국군 1사단이 분전했다. 백선엽 사단장이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외치며 진두지휘했다. 간신히 방어선이 유지되었다. 한 달 넘게 사투가 계속되었다. 8월 말이 되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도 보급선이 늘어나고 병력 손실이 커서 더 이상 밀어붙이기 어려웠다. 바로 그때, 맥아더가 움직였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군 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맥아더 장군의 도박이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이 극히 어려운 곳이었다. 참모진 대부분이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밀어붙였다. "적이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한다." 월미도 상륙을 시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었다. 북한군의 배후를 찔렀다. 보급로가 끊겼다. 전선이 무너졌다.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혼란에 빠졌다. 퇴로가 끊긴 병력이 속속 항복하거나 궤멸되었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평양이 함락되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통일이 코앞인 듯했다. 그러나 새로운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10월~12월: 중공군 개입과 후퇴】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처음에 유엔군은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했다. "아무리 많아도 수만 명이겠지." 틀렸다. 30만 명이 넘는 중국군이 산과 계곡에 숨어 있다가 일제히 공격해왔다. 11월 말, 중국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유엔군은 다시 후퇴했다. 이번에는 더 참혹했다.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 속에서 퇴각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포위된 상태에서 혹한과 싸우며 철수해야 했다. 흥남 철수 작전이 벌어졌다. 10만 명의 군인과 10만 명의 피란민이 배에 올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 4천 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흥남을 빠져나왔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태운 단일 선박이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다. '1.4 후퇴'였다. 【교착과 휴전】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51년 3월,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했다.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요동치다가 고착되었다. 밀고 당기는 전투가 2년 더 이어졌다. 1951년 7월,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2년이나 걸렸다. 그동안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백마고지,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고지 하나를 두고 수천 명이 죽어갔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1개월 2일 만이었다. 휴전이었지, 종전이 아니었다. 평화협정은 체결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흔: 숫자로 보는 비극】 3년간의 전쟁이 남긴 상처는 처참했다. 한국군 전사자 약 13만 명, 부상자 45만 명, 실종 및 포로 3만 명. 유엔군(미군 중심) 전사자 약 4만 명, 부상자 10만 명 이상. 북한군 전사자 약 40~50만 명. 중국군 전사자 약 15~40만 명(추정치 차이 큼).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민간인 피해였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약 99만 명. 북한 민간인 사망자 약 150만 명 이상. 이산가족 약 1천만 명. 폭격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학살로 마을이 사라졌다. 노근리, 거창, 국민보도연맹 학살... 남과 북 양측 모두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쟁 후 한반도에서 1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헤어진 가족을 평생 만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종장: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던 민족이 서로를 죽였다. 외세의 개입과 이념의 대립이 형제를 원수로 만들었다. 전쟁의 결과, 한반도는 더 깊이 분단되었다. 38선은 군사분계선(MDL)이 되었고, 비무장지대(DMZ)가 설치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남과 북은 대치하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은 또 다른 것도 남겼다.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선 의지,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통일에 대한 염원. 매년 6월 25일, 우리는 그날을 기억한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세대가 점점 줄어들지만, 기억은 이어져야 한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것이 6.25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의의

한반도를 폐허로 만든 3년의 전쟁. 분단의 고착화와 수백만 사상자.

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 한국전쟁 구술기록
  • 유엔군 사령부 자료
  • 중국 측 전쟁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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