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녀 징발과 찢겨진 가족의 비극 (서기 1274-1350년대)
원나라의 요구로 강제로 끌려가야 했던 고려의 어린 딸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민족적 비극이 일상이 되었던 시대
- 연도: 1274-1350s
- 시대: 고려
- 상대: 원(元)나라
- 장소: 고려 전역 및 원나라 대도(북경)
- 피해: 수천 명의 여성 강제 징발 및 인권 유린
본문
서기 1274년, 고려의 국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 위로 흰색 소복을 입은 소녀들의 긴 행렬이 나타났다. 원나라의 황실과 귀족들에게 바쳐질 '공녀(貢女)'들이었다.

나무 수레에 실려 고향을 떠나는 어린 딸들을 향해 어머니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울부짖으며 달려갔다. "내 딸을 살려내라"는 통곡은 한반도의 산하를 뒤덮었으며, 이는 고려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인권 유린의 기록이자 지울 수 없는 민족의 한으로 새겨졌다. 고려 조정은 원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결혼도감(結婚都監)'이라는 가혹한 관청을 설치했다. 관원들은 고려 전역의 마을을 돌며 열세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의 처녀들을 물건 고르듯 조사하고 선발했다.

두려움에 떨며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들 앞에서 냉정하게 명부를 작성하는 관리들의 모습은 지옥의 사자와도 같았다. 선발되지 않기 위해 얼굴에 흉터를 내거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조차, 원나라의 강압적인 요구 앞에서는 대부분 무력하게 무산되었다. 이 참혹한 징발을 피하기 위해 고려 사회에는 '조혼(早婚)'이라는 비정상적인 풍습이 생겨났다. 공녀 대상에서 제외되기 위해 아직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일곱, 여덟 살의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혼례복을 입고 가짜 혼인을 올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축복받아야 할 결혼식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아이들은 자신이 왜 이토록 무거운 예복을 입고 낯선 아이와 마주 앉아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국가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할 때, 아이들의 동심마저 제물이 되어야 했던 시대의 비극이었다. 결국 국경을 넘어 원나라의 차가운 대지로 끌려간 소녀들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영원한 유랑의 길에 들어섰다.

압록강을 건너며 멀어지는 조국의 산천을 바라보던 이름 없는 소녀의 눈망울에는 그리움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몽골의 거친 사막과 낯선 언어 속에서 그녀들은 황실의 무수리가 되거나 귀족들의 시녀가 되어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원나라의 황후(기황후 등)가 되어 권력을 쥐기도 했으나, 대다수의 공녀는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소리 없이 스러져간 '역사의 조연'들이었다. 원나라 궁궐의 화려함 속에서도 고려 여인들은 늘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었다.

그녀들이 전파한 고려의 복식과 음식은 원나라 상류층 사이에서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유행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 화려한 유행 이면에는 가족과 생이별한 여인들의 맺힌 한이 서려 있었다. 80년 넘게 이어진 공녀 제도는 고려 여인들에게 지우기 힘든 삶의 상처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주권을 잃은 민족이 치러야 했던 가장 시리고 아픈 대가로 기록되어 있다.
의의
한민족 역사상 유례없는 여성 인권 유린 사건. 조혼 풍습 등 사회 구조의 왜곡을 초래한 외세 침략의 산물.
출처
- 고려사
- 동국통감
- 금사(金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