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거와 민족의 영웅 (서기 1909년)
동양 평화를 외친 총성.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의사의 결의와 순국
- 연도: 1909
- 시대: 대한제국
- 상대: 일본 제국 (이토 히로부미)
- 장소: 만주 하얼빈역
- 피해: 안중근 사형, 이토 히로부미 사망
본문
서기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역 플랫폼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세 발이 더 발사되었다. 총탄은 일본 제국의 원로이자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명중했다.

총을 든 이는 서른 살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었다. 그는 쓰러지는 이토를 향해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다.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순간이었다. 안중근은 왜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는가.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의병에 대한 무차별 학살...

그는 여순 감옥에서 직접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읊었다. "명성황후 시해", "고종 황제 폐위", "군대 해산", "수만 명의 무고한 한국인 학살"... 안중근에게 이토 처단은 개인적 복수가 아니라, 동양 평화를 해치는 원흉에 대한 천벌이었다.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를 '전쟁 포로의 정당한 교전 행위'라고 항변했다.

그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국의 수괴를 처단한 것이지, 개인 자격의 암살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그는 '동양평화론'을 펼치며 한·중·일 삼국이 상호 존중하는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를 일반 살인범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서기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만 32세였다.

사형 집행 전 그는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返葬)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1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안중근은 비록 죽었으나, 그의 의거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천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의의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 의거.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의지를 알린 역사적 사건.
출처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일본 재판 기록
- 동양평화론
-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