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술국치와 잃어버린 들판 (1910년)
519년 조선왕조의 종말. 한민족이 나라를 잃다
- 연도: 1910.8.29
- 시대: 대한제국
- 상대: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 장소: 서울 (한성)
- 피해: 국권 상실, 35년 식민지배의 시작
본문
【서장: 무너져가는 나라】 1910년, 대한제국은 이름만 남은 나라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사실상 지배했다. 1907년에는 군대마저 해산당했다. 고종은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허수아비 황제로 앉았다. 그래도 나라는 아직 있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황제라는 칭호, 조금이나마 남은 내정권... 그것마저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한민족의 저항 의지를 보여준 장거(壯擧)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일본 강경파에게 병합을 서두를 구실을 주었다. "조선인들은 위험하다.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1910년 5월, 육군 대장 출신의 강경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3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명확했다. 한일합방, 즉 대한제국의 완전한 병합이었다. 【병합의 강압】 데라우치는 병합을 위해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먼저 친일파를 매수하고, 반대파를 탄압했다. 언론을 통제하고, 집회를 금지했다. 조선 곳곳에 일본 군대와 헌병이 배치되었다.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협상의 전면에 나섰다. 을사오적(乙巳五賊) 중 하나인 이완용은 이미 을사늑약부터 일본의 하수인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제1조는 이렇게 시작했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519년 역사의 조선왕조가, 13년 된 대한제국이, 종이 한 장으로 사라졌다. 【1910년 8월 29일: 치욕의 날】 조약은 8월 22일에 체결되었으나, 공포는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이루어졌다. 일본은 조선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모든 것을 진행했다.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8월 29일이 되어서야 '합방 조칙'이 공포되었다. "대한제국은 오늘부터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조선인들은 그절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이는 울었다. 어떤 이는 분노했다. 그날, 조약 체결에 참여한 친일파 8인에게 일본 정부는 작위와 은사금을 주었다. 이완용은 백작이 되었다. 나라를 판 대가였다. 황제 순종은 창덕궁에 유폐되었다. 황제가 아닌 '이왕(李王)'이라는 칭호로 격하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그렇게 일본 귀족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저항은 있었다】 나라가 망하는 날,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황현(黃玹)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구한말의 대표적 우국지사였던 그는 합방 소식을 듣고 유서를 남겼다. "나는 조선인으로 태어나 조선인으로 죽겠다." 그는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른바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새 깃털로 역사를 꾸미니 어찌 쓸쓸하지 않으랴 등불 아래 책 덮으니 만고의 마음 아프도다 나라 운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식인 된 것이 참으로 부끄럽구나" 황현 외에도 많은 이들이 순국(殉國)하거나 자결했다. 그들은 나라와 함께 죽기를 택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계속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봉기한 의병들은 합방 이후에도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일본군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여 의병을 진압했다. 수많은 의병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저항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은 국내와 해외에서 이어졌다. 【식민지의 시작】 합방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총독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임명되었다. 조선총독은 일본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입법, 사법, 행정 모든 권한을 장악했다. 조선인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다. '무단통치(武斷統治)'가 시작되었다. 헌병과 경찰이 조선을 지배했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모두 금지되었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다. 명목은 토지 제도의 근대화였으나, 실제로는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는 수탈이었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 증명자료가 없는 토지는 모두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쌀 수탈이 시작되었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조선 농민들은 쌀을 일본에 빼앗기고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다. 【잃어버린 것들】 합방으로 잃은 것은 영토만이 아니었다. 나라의 이름을 잃었다. '대한제국', '조선'이라는 이름 대신 '조선'이라 불리게 되었으나, 그것은 일본 제국의 한 지역을 뜻할 뿐이었다. 국어를 잃어갔다. 학교에서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고, 조선어는 '조선어' 과목으로 축소되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폐지되었다. 이름을 잃었다. 창씨개명(創氏改名) 정책으로 조선인들은 일본식 이름으로 바꿀 것을 강요받았다. 역사를 잃었다. 일본은 조선사를 왜곡하여 '조선은 원래 열등한 민족이며 일본의 지배가 필요하다'는 식민사관을 주입했다. 수많은 사람을 잃었다. 35년 식민지배 동안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강제 징용과 징병으로 수십만 명이 끌려가 죽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발생했다. 【종장: 8월 29일을 기억하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 이 날은 한민족이 나라를 잃은 날이다. 519년 이어진 왕조가, 2천 년 이상 이어진 국가 전통이 끊어진 날이다. 왜 나라가 망했을까? 원인은 복합적이다. 조선 후기 이래의 내부적 모순. 개화의 실패. 열강들 사이에서의 외교 실패.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 어느 하나만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국력의 부재였다.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다. 군대가 약했고, 경제가 약했고, 외교력이 부족했다. 힘이 없으면 정의도 명분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1910년 8월 29일이 증명했다. 35년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암흑 속에서도 독립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이 터져 나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독립군이 만주에서 싸웠고, 애국지사들이 감옥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이 왔다. 그러나 경술국치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라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내부가 단결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8월 29일.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는 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
의의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 35년 식민지배의 시작.
출처
- 순종실록
- 한일합방조약 원문
- 황현 절명시
- 일본 외교문서
- 통감부 문서
- 독립운동사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