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미사변과 국모의 비극 (1895년)
일본 낭인들이 조선 궁궐에 침입해 왕비를 시해. 전대미문의 만행
- 연도: 1895.10.8
- 시대: 조선/대한제국
- 상대: 일본 (미우라 고로 공사)
- 장소: 경복궁 건청궁
- 피해: 명성황후 시해
본문
【서장: 조선의 국모 민비】 민비(閔妃), 후일 명성황후(明成皇后). 조선 26대 왕 고종의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후. 그녀는 논쟁적인 인물이다. 어떤 이는 그녀를 망국의 원인으로 보고, 어떤 이는 국권 수호를 위해 싸운 비운의 여성으로 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녀의 죽음은 국제법적으로 전대미문의 만행이었다. 명성황후는 본관 여흥 민씨 출신으로, 1866년 16세에 고종과 혼인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섭정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외척 세력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가세가 미미한 집안에서 왕비를 들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예상과 달랐다. 영리하고 야심 찬 그녀는 궁중 정치를 빠르게 익혔고, 대원군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선언되면서 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의 민씨 일족이 권력을 잡았다. 이후 조선은 격변의 시대로 들어갔다. 개항,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명성황후는 이 모든 격류 속에서 권력 유지를 위해 분투했다. 【청일전쟁과 일본의 승리】 1894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 일본도 군대를 파견했다.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충돌했다. 결과는 일본의 압승이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일전쟁이 끝났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500년간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중국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일본은 조선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그들은 김홍집 친일 내각을 세우고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복병이 있었다.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의 반격: 아관파천의 구상】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에 위기감을 느꼈다. 청나라가 물러간 자리에 일본이 들어오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이 뻔했다. 그녀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았다.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며 극동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들도 일본의 조선 장악을 원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접촉을 시작했다. 1895년 봄, 일본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에 요동반도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삼국간섭'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얻은 요동반도를 토해내야 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친일파가 밀려나고 친러파가 득세했다. 명성황후의 공작이 성공한 것이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갈아치워졌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楼)가 새 공사로 부임했다. 미우라는 군인 출신의 강경파였다. 미우라는 판단했다. "조선을 장악하려면 민비를 제거해야 한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여우 사냥】 1895년 양력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5시경. 경복궁이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검은 그림자들이 궁성을 향해 움직였다. 일본 공사관 소속 군인과 경찰, 그리고 일본 낭인(浪人)들. 일본 본토에서 모집한 무뢰배들이었다.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했다. 가담한 한국인 훈련대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궁성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난입했다. 궁궐 경비병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총성이 울리고, 비명이 터졌다. 암살단은 건청궁(乾淸宮)을 향했다.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는 곳이었다. 고종은 붙잡혔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한 곳에 가두어졌다. 암살단은 명성황후를 찾았다. 궁녀들에게 물었다. "왕비가 어디 있느냐!" 궁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낭인들은 칼로 위협하고, 궁녀들을 끌어냈다. 명성황후는 피하려 했다. 그러나 궁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왕비의 최후】 정확한 최후의 장면은 기록마다 다르다. 일본 측은 기록을 숨기려 했고, 조선 측 목격자들의 증언도 엇갈린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발견했다. 그녀는 붙잡혔다. 칼이 휘둘러졌다. 명성황후가 쓰러졌다. 반복적으로 벤 흔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시신을 욕보였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인들은 시신을 녹원(鹿園)으로 옮겼다. 장작을 쌓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다. 조선의 국모를 암살하고, 시신마저 태워 증거를 없애려 한 것이다. 날이 밝았을 때, 경복궁에는 피 냄새와 불탄 냄새가 가득했다. 명성황후의 나이 45세. 29년간 조선의 국모였던 그녀가 일본 낭인들의 손에 죽었다. 【국제 사회의 반응과 일본의 은폐】 을미사변 소식은 세계로 퍼졌다. 국제 사회는 충격을 받았다. 한 나라의 외교관과 군인이 다른 나라의 궁궐에 침입해 왕비를 살해하다니. 이것은 국제법적으로 전례 없는 범죄였다. 외국 신문들이 일본을 규탄했다. "야만적인 행위", "문명국이라 자처하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일본 정부는 당혹했다. 그들은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다. 미우라 고로와 관련자들을 일본으로 소환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그 재판은 희극이었다.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무죄 방면되었다. 조선의 국모를 죽인 자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이다. 조선 조정은 무력했다. 항의는 했지만, 일본에게 강제할 힘이 없었다. 【아관파천과 고종의 복수】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공포에 휩싸였다. 아내가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음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일본은 친일 내각을 통해 고종을 사실상 감금 상태에 두고 있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러시아의 비호 아래 고종은 친일 내각을 해체하고 친러 내각을 세웠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고종은 아관에서 1년간 머물렀다. 그동안 일본의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조선은 여전히 약했고,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고종이 환궁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도, 일본의 야욕은 계속되었다. 【종장: 기억의 의무】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은 한일 관계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범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역사의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외척 정치의 폐해, 매관매직, 권력 다툼... 그녀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의 범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 나라의 왕비가 외국인에게 살해당했다. 그것도 궁궐 안에서, 잔혹하게. 이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는 범죄다. 127년이 지난 지금, 경복궁 건청궁 자리에는 복원된 건물이 서 있다. 그곳을 지나는 관광객들 중 그날 밤의 비극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을미사변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저지른 만행의 시작이었다. 15년 후 나라를 빼앗기기 전, 이미 일본은 조선의 국모를 살해했다. 그 기억은 화해와 미래를 위해서라도 잊혀서는 안 된다.
의의
일본에 의한 조선 왕비 시해. 국제법상 전대미문의 범죄.
출처
- 고종실록
- 일본 외교문서
- 러시아 공사관 기록
- 주한 외국 공사관 보고서
- 목격자 증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