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1636년)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한 굴욕. 임금이 적장에게 무릎 꿇다
- 연도: 1636.12-1637.1
- 시대: 조선
- 상대: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 장소: 남한산성, 삼전도
- 피해: 50만 명 포로, 삼배구고두례 굴욕
본문
【서장: 광해군의 선견지명】 병자호란의 비극을 이해하려면 광해군(光海君)부터 시작해야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동아시아의 판도가 바뀌고 있었다. 만주에서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웠다. 후금은 급격히 성장하여 명나라를 위협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으니, 이제 조선이 명나라를 도울 차례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고민에 빠졌다. 명나라는 은인이었다. 그러나 후금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섣불리 명나라 편에 섰다가 후금에 적이 되면 어떻게 하나?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선택했다. 강홍립(姜弘立)을 파견하며 "형세를 보아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강홍립은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 항복했다. 명나라는 분노했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전쟁을 피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새 정권은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버리고 '숭명배금(崇明排金)', 즉 명나라를 받들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선언했다. 이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1627년: 정묘호란의 경고】 새 정권의 반금 정책에 후금이 반응했다. 1627년, 후금의 아민(阿敏)이 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정묘호란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했고, 강화 협정을 통해 간신히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조선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여전히 후금을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했다. 심지어 명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명나라를 도와 후금을 치자"는 주전론이 강했다.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皇太極)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했다. 그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했다. "오랑캐가 감히 황제를 칭하다니!" 청나라 사신은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다. 홍타이지는 결단을 내렸다.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겠다. 【1636년 12월: 청군의 침공】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번에는 9년 전 정묘호란과 달랐다. 황제가 친정(親征)한 것이다. 청나라 총병력의 대부분을 동원한 전면전이었다. 청군의 진격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만주 기병은 하루에 100리 이상을 이동했다. 조선 조정이 침공 소식을 접했을 때, 청군은 이미 평양을 지나고 있었다. 12월 8일,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피란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청군 선봉이 한강을 건너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인조는 갈 곳이 없었다. 급히 방향을 바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만 3천 명의 병력과 50일분 식량을 가지고. 12월 14일,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남한산성: 45일간의 포위】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험준한 산 위에 있어 기마병 중심의 청군이 공성하기 어려웠다. 청군은 직접 공격 대신 포위 전략을 택했다. 산을 둘러싸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굶겨서 항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성 안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의 대립이었다. 척화파의 대표는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 등이었다. 그들은 주장했다. "오랑캐에게 무릎 꿇을 수 없다. 끝까지 싸우다 죽자." 주화파의 대표는 최명길(崔鳴吉)이었다. 그는 말했다. "지금 싸워서 이길 가망이 없다. 나라가 망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굴욕스럽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인조는 망설였다. 척화파의 명분이 옳았지만, 현실은 주화파의 말대로였다. 성 안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식량이 줄어들고, 추위가 엄습했다. 그해 겨울은 특히 혹독했다.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쓰러졌다. 각지에서 구원군이 출발했다. 그러나 청군의 저지에 막혀 남한산성에 닿지 못했다. 강화도마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화도에 피란시켜놓은 세자빈(昭顯世子嬪)과 봉림대군(鳳林大君) 등 왕실 가족이 청군의 손에 떨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 1637년 음력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한강변 삼전도(三田渡).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이었다. 인조는 청색 융복(戎服)을 입고 있었다. 왕의 상징인 홍색 곤룡포가 아니라, 신하의 옷인 청색 옷. 이미 패배를 인정한 복색이었다. 삼전도에 도착한 인조 앞에 홍타이지의 보좌(寶座)가 있었다. 그 앞에 수항단(受降壇)이 설치되어 있었다. 항복을 받는 단. 인조가 무릎을 꿇었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되, 매번 머리를 세 번씩 땅에 찧는 예법. 모두 합해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박아야 했다. 조선의 임금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여진족 황제 앞에서, 무릎 꿇고 이마를 땅에 찧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마에서 피가 났다는 기록도 있다. 45일간 포위된 성에서 굶주린 왕의 체력으로 아홉 번 고두를 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 광경을 조선의 신하들이 지켜보았다. 어떤 이는 울었고, 어떤 이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아무도 막지 못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항복 조건】 굴욕은 삼배구고두례로 끝나지 않았다. 홍타이지가 요구한 항복 조건은 가혹했다. 1. 조선은 명나라와 단교하고 청나라의 신하국이 된다. 2. 청나라 연호를 사용한다. 3. 왕자를 인질로 보낸다. 4.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조선군을 파병한다. 5. 세폐(歲幣)를 바친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 효종)이 인질로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8년간 청나라에 억류되었다. 더 비참한 것은 백성들의 운명이었다. 청군이 철수하면서 약 50만 명의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갔다.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그들은 청나라에서 노예로 팔렸다. 전쟁 후 조선 조정은 '속환(贖還)' 정책을 펼쳐 포로들을 돈을 주고 되사오려 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들은 돈이 없어 가족을 찾아오지 못했다. 양반가 여성들 중에는 돌아왔다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많았다. '환향녀(還鄕女)'라는 멸시적 호칭이 그들에게 붙었다. 【삼전도비】 홍타이지는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자신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라. 그렇게 세워진 것이 삼전도비(三田渡碑), 정식 명칭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비석에는 청 태종의 '어진 정벌'과 인조의 '항복'이 새겨졌다. 조선의 치욕을 영원히 기록한 돌덩이였다. 조선 백성들은 그 비석을 증오했다. 청나라가 망한 후, 삼전도비는 여러 번 훼손되거나 매몰되었다. 그러나 현재 그 비석은 서울 송파구에 복원되어 있다.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종장: 치욕을 잊지 않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굴욕이었다. 임진왜란이 7년에 걸친 처절한 항쟁이었다면, 병자호란은 45일 만에 무릎 꿇은 완패였다.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이 있었고, 의병이 있었고, 결국 왜군을 물리쳤다. 병자호란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첫째,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를 폐기하고 명분만 앞세운 것이 화근이었다. 명나라는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였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세력이었다. 현실을 무시하고 명분만 외치다 재앙을 불렀다. 둘째, 군사적 대비가 전무했다. 정묘호란의 경고를 받고도 9년간 제대로 된 군비 강화를 하지 않았다. 청군이 쳐들어왔을 때 막을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 셋째, 지도층의 무능과 분열이었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논쟁 속에서 인조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표류했다. 싸우려면 끝까지 싸워야 하고, 협상하려면 일찍 해야 했다. 양쪽 모두 하지 못한 채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치욕을 씻겠다는 '북벌론(北伐論)'이 일어났다. 효종은 청에서 돌아온 후 북벌을 준비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북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병자호란의 기억은 조선 사회에 200년 이상 각인되었다. 삼전도의 굴욕. 그것은 국가가 무너지면 임금도 백성도 모두 치욕을 겪는다는 뼈저린 교훈이었다. 우리는 그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의의
조선 역사상 최대의 외교적 굴욕. 청나라에 대한 조공국 전락.
출처
- 인조실록
- 남한일기
- 연려실기술
- 삼전도비문
- 병자록
- 청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