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사군 설치 (기원전 108년)
한 무제의 침공으로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됨
- 연도: BC 108
- 시대: 고조선
- 상대: 한(漢)나라
- 장소: 한반도 북부
- 피해: 고조선 멸망
본문
기원전 109년의 가을, 한반도의 북방을 호령하던 고조선의 하늘 위로 불길한 징조가 드리웠다. 당시 고조선은 유목 제국 흉노와의 연합을 통해 한나라의 동진을 저지하며, 동북아시아의 무역 질서를 주도하던 강력한 국가였다. 한나라 무제에게 고조선은 중화 질서의 완성을 방해하는 가장 거대한 걸림돌이었으며, 반드시 꺾어야 할 동방의 자존심이었다. 이 거대한 비극의 서막은 단순한 외교적 마찰이 아닌, 제국주의적 야욕과 민족의 생존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거대 전쟁'의 시작이었다. 한나라는 즉각 5만 명의 육군과 7천 명의 수군을 동원하는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단행했다.

육군은 좌장군 순체가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했으며, 수군은 누선장군 양복이 이끌고 발해만을 건너 고조선의 심장부 왕검성으로 향했다. 고조선의 병사들은 패수 언덕에서 거대한 한나라 군대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다. 초기 전투에서 고조선군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한나라의 수군을 대패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전쟁이 10개월을 넘기면서 왕검성은 서서히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성 안의 풍경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이때 고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외부의 칼보다 무서운 내부의 분열이었다. 항복을 주장하던 이계상 삼(參), 상 한음(韓陰), 장군 왕겹(王唊) 등 주화파 귀족들은 우거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우거왕은 "내 조상의 땅을 한 치도 적에게 줄 수 없다"며 결사 항전을 외쳤으나, 이미 겁에 질린 배신자들의 마음은 한나라의 금빛 유혹을 향하고 있었다. 기원전 108년 초여름의 어두운 밤, 비극의 칼날이 왕의 침소로 향했다. 이계상 삼은 자객을 보내 고조선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우거왕을 시해했다.

왕의 목이 한나라 진영으로 전달되던 순간, 왕검성의 성벽은 굳게 닫힌 채 적막만이 감돌았다. 왕이 죽었음에도 백성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강경파 장수 성기(成己)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다시 성문을 굳건히 지키고 섰다. 성기 장군은 "왕이 죽었으나 백성이 살아 있으니 나라는 죽지 않는다"고 외치며 군관민을 하나로 묶었다. 한나라는 이미 항복한 우거왕의 아들 태자 장항(長降)과 귀족들을 앞세워 성 안의 장병들을 회유했다. 결국 성기 장군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손에 의해 뒤에서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의 죽음과 함께 고조선 700년의 역사를 지탱하던 왕검성의 성문은 비명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성 안으로 들이닥친 한나라 군사들은 복수의 광기 속에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했다. 한 무제는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라는 네 개의 군(郡)을 설치했다. 이른바 한사군이다.

이후 한반도 북부는 약 400년 동안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수치와 고통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왕검성이 불타오르던 그날 밤, 한반도의 첫 번째 국가가 겪어야 했던 이 거대한 한(恨)은 우리 민족사의 심장 깊은 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의의
한민족 최초의 고대국가 멸망. 이후 4세기까지 한반도 북부가 중국 군현의 지배 아래 놓임.
출처
- 사기
- 한서
- 삼국지 위서 동이전